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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보다 귀한 검정 고무신
강신봉 | 토론토
- 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 Jan 30 2025 03:03 PM
1945년, 해방이 되던 해의 봄에 나는 일본 소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 때에 나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꽃집신을 신고 입학을 했다. 당시, 78명이 입학을 했는데 고무신을 신고 온 아이는 겨우 3명 뿐이었고 모두는 집신이었다. 그래도 빨갛고 노란 한겁을 넣어서 삼은 꽃집신은 다른 집신보다 고급스러워 보였기에 나는 제법 기를 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검정 고무신을 신고 온 그 3명의 아이들은 양반(귀족) 집의 아이들 같아서 첫날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검정 고무신이 그 학생의 신분을 이야기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릴 적에 벌써 그런 양반 쌍놈의 사회 계급적 관념이 내겐 있었던 것 같이 지금도 생각이 든다. 왜정 36년에 많이 달라졌지만 해방이 되던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사회에는 양반 쌍놈의 개념이 깊이 잔재해 있었다.
발보다 귀한 신발, 그땐 그랬다. 발바닥에 묻은 흙이야 쓱쓱 닦아 내면 그만이지만 새 신발에 흠집이 나는 건 싫었다. 방학 내내 엄마를 졸라서 새로 산 타이어표 검정 고무신. 차마 신기가 아까워서 고무신을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 가도 날아갈 듯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검정 고무신은 생김새가 똑같아서 친구들의 신발과 바뀌기 쉽고, 새것은 종종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새로 고무신을 사면 신발 안쪽에 살짝 자기만 아는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래도 가끔 새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가서 신발장에 놓고 들어가 공부를 하고 나오면, 그 새 고무신이 없어지는 바람에 덩그러니 신발장에 남아 있는 낡은 고무신을 신고 훌쩍거리며 집에 가는 아이도 있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때는 그렇게 고무신이 바뀌는 일이 종종 있었다.
워낙 모든 게 귀하고 가난하던 시절이라 새 신발에 얽힌 추억은 많다. 웬만큼 해지지 않고는 새로 사주지도 못 하거니와, 새로 살 때는 발이 쑥쑥 큰다는 이유로 으레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로 큰 걸 사주었다. 새것은 헐렁한 데다 딱딱하기까지 하니 발뒤꿈치가 까지기 일쑤였고 그러다 이윽고 신발이 발에 잘 맞을 때쯤 되면 그땐 벌써 너무 닳아서 구멍이 뚫리곤 했다. 후에 세상이 조금 좋아져서 어쩌다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친구들이 있어도 부럽지 않았다. 사실 시골에서는 고무신이 더 편했다. 물에 젖어도 탁탁 털어 신으면 그 뿐이고 낡은 고무신은 낭창낭창하고 말랑말랑하여 발도 편하고 마음도 편했다. 친구들과 냇가에서 놀다가 송사리를 잡으면 물 채운 고무신에 집어넣었다가 집에 돌아갈 땐 다시 놓아주었다. 또 누구 신발이 그 개천 물결에 더 빨리 흘러가는지 시합하다가 갑자기 센 물살을 만나 빠르게 떠내려가도 헌 신발일 경우엔 뒤쫓아가는 마음이 덜 다급했다. 게다가 헌 고무신은 엿장수 아저씨의 엿 한 가락과 바꿔 먹으니 마지막까지 쓸모가 있었다.
사진/필자 제공
그렇게 인생살이가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때는 그래도 친구들 간에 인정도 많았고 아름답던 추억거리도 많았다. 지금의 어린이들에게 과연 그러한 추억거리가 있을까? 생각을 해 본다.
물질의 풍부속에 마음이 가난한 세상! 그것이 오늘을 살아 가는 행복 속의 불행이 아닐까!…. 설날 아침에 회상에 잠겨 본다.
강신봉 | 토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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