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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 위에 관상, 관상 위에 눈치다’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Feb 12 2025 02:32 PM
‘사주 위에 관상, 관상 위에 눈치다’
며칠 전이 정월 대보름이었다. 이곳 토론토에서는 ‘대보름이 언제였지?’ 할 정도로 관심이 없지만, 고국에서는 음력으로 설날 지나 첫 맞이하는 정월 대보름은 중요한 명절이었다.
이날은 동네 동무들과 함께, 빈 깡통으로 불통을 만들었다. 못으로 깡통 이곳저곳에 구멍을 뚫어 양 옆에 철사 줄을 달아 그 안에 솔방울이나 나무 조각, 종이 등을 가득 채운 후 불을 붙였다. 당시에는 철사 줄이 귀해 전깃줄로 끈을 만들어 큰 원으로 빙빙 돌리면 타는 불이 허공 속에서 긴 곡예를 펼치며 불 쇼를 연출했다. 평소 같으면 ‘불장난을 한다’고 야단을 맞았을 텐데, 이날은 동네 어른들도 그런 불장난을 눈 감아 주었다. 어떤 어른들은 우리가 만든 불 깡통을 빌려, 자기가 신나게 돌려 재주를 뽑냈다. 아마, 난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 짓을 했을 게다.
달과 술을 좋아한 이태백은 이민자로 이란계 중국인이라는 설이 있다.
대보름 같은 명절에는 TV에 단골로 나오는 노래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로 시작하는 김부자의 <달타령>이었다. 민요풍인 이 노래는 따라 부르기도 쉽고, 가사도 재미있어서 인기가 많았다. 요즘도 다른 가사는 다 잊어버렸지만, ‘이태백이 놀던 달아’는 여운이 남는다.
당나라 사람인 이태백은 중앙아시아의 쇄엽(碎葉/Suy-ab)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쇄엽은 현재 키르기스스탄 북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당시 이란 동부의 코라손 권(圈) 출신으로 5세 때 부친과 함께 쓰촨 성의 강유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니까 이태백은 이민자로 이란계 중국인이라는 설이 있다.
이태백의 아버지는 장사하던 페르시아 계 무역상이었다. 때문에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해서 정상적인 공부는 하지 못하지만, 부유한 청년기를 보낸다. 촉나라에 정착하며 동암자라는 선인에게 도교를 수양하여 큰 깨달음을 얻는다. 26세 이후, 고향을 떠나 강남을 여행한다. 이태백의 시에는 그가 이란계여서인지, 페르시아 여인이 자주 등장한다. 술과 사랑, 즉 주색은 페르시아 문학의 중요한 요소이며, 흔히 술은 ‘신의 이슬’에 비유된다. 그가 주색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되는 것은 그의 바탕에 페르시아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태백은 달과 술을 좋아했다. 사흘에 두 번은 술을 마셨지만, 혼자 밤낮을 이어 마신 날이 많았다고 한다. 달 아래서 홀로 술잔을 기울인 그의 모습은 마치 신비한 의식을 거행하는 수도승과 같았다. 이태백이 노래하면 달이 이리저리 서성였고, 춤을 추면 달그림자가 어지러이 움직였다고 한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된 것이다. 밝은 달과 어둑하게 물든 달그림자, 그리고 낭만파 시인 이태백, 그렇게 셋이서 벌이는 술판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그가 43세 때다. 당나라 황제 현종 시절, 발해의 사신들이 와서 서신을 전달했지만 조정 누구도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황제가, “이 많은 문관들 중에 단 한 명도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다니, 만일 사흘 만에 아무도 이 서신을 해독하지 못하면 그대들의 지위를 박탈하겠다”라고 겁박을 주었다.
그때 하지장이란 신하가 황제에게 다가와 “신이 폐하께 아룁니다. 이태백이라는 뛰어난 시인이 있는데 여러 학문에 능통합니다. 그를 불러 이 서신을 읽으라 하소서.” 현종은 이태백을 즉시 궁으로 불렀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현종을 그를 달래기 위해 직위와 의복을 하사했다. 궁에 온 이태백은 발해 글로 된 서신을 번역했다. 발해가 자유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하겠다는 <선전포고문>이었다.
그는 편지를 읽은 뒤 박식하고 무시무시한 답신까지 구술하고 현종에게 서명하라고 권했다. 현종은 이태백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라 칭송한다. 발해는 사과와 함께 공물을 보내왔다. 현종은 공물 중 일부를 이태백에게 하사했다. 그리고 술을 좋아하던 그는 이 선물을 다시 주점 주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 뒤, 이태백은 현종의 칙령을 받아 후학을 가르치는 한림곤봉이 된다. 하지만, 당시 부패한 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다.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바랐으나, 이태백의 야망과 성격은 궁정의 분위기와 맞지 않았다. 그는 어지러운 조정 분위기와 궁정 시인으로서의 처지에 답답함을 잊고자 장안의 한량들과 어울려 술을 즐겼다.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박진감이 있으며 때때로 환상적이다. 또한 매우 자유로우며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한 번에 지었다. 황제 현종은 그런 그의 시를 좋아했다. 황제가 그를 좋아한 또 다른 이유는 양귀비 때문이었다. 현종은 며느리인 양귀비를 좋아했는데, 이태백은 그들의 비밀 불륜 애정사를 시로 지어 주었던 것이다. 양귀비도 그를 흠모해 옆에서 먹을 갈았다고 한다.
이태백이 술이 취해 측근이었던 환관(내시)에게 “내 신발 좀 벗겨봐라. 이 고자 놈아!”하며 고역사(高力士*환관 이름)와 다툰 일화가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셨기에 궁에서 부를 때도 대개 취해 있었다. 한 번은 현종의 부름을 받고 시를 읊었는데, 술이 취해 측근이었던 환관(내시)에게 “내 신발 좀 벗겨봐라. 이 고자 놈아!”하며 고역사(高力士*환관 이름)와 다툰다. 그 일로 파면돼 사직하게 된다. 궁을 떠나 낙양으로 가, 당대의 시인 두보와 함께 전국을 여행한다. 그가 44세 때 일이다. 54세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오지만,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웠다. 말년에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다가, 61세에 안후이 성에서 사망한다.
지난 2월 4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탄핵 심판에 나온 윤석렬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보면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지시했니, 지시받았니, 이런 얘기들이 마치 호수 위에 빠진 달그림자 같은 걸 쫓아가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라고 주장한다.
평소 술을 즐기는 윤 대통령이 ‘호수에 빠진 달그림자’라 말하는 문학적 표현을 듣고, 마치 영화처럼 그와 이태백의 허상이 겹쳐졌다. 술에 취한 이태백이 ‘비단아씨한테 사주 만 봐서는 안돼, 사주 위에 관상이고 관상 위에 눈치다. 요놈들아! 그렇게 눈치도 없냐?’라며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다. 요즘 고국은 참, 눈치도 없는 ‘아무 말 잔치’ 속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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