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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살아야 했던, 대통령의 큰 딸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Feb 26 2025 05:36 PM
MBC에서 1992년 2월부터 26부작으로 방영된 <제3공화국>은 박정희의 청년 및 군인 시절의 행적과 5.16 군사정변을 거쳐 유신에 이르는 제3공화국 기간을 조명한 드라마다. <제3공화국>은 기존의 정치 드라마들과는 다르게 관련자들의 증언을 중간 중간에 삽입함으로써 사실감을 높였다. 한일 회담 에피소드에서는 전직 일본 총리대신인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증언을 했고, 박근혜의 이복 언니인 박재옥이 최초로 언론에 나온다.
왼쪽부터 박정희와 박근령, 박재옥, 의붓 외조모 이경령, 의붓 외사촌 동생 홍소자, 남편 한병기, 육영수, 여동생 박근혜, 의붓 이모 육예수(박재옥 출가 후, 신당동 육영수 어머니 자택에서 가족사진). 중앙포토
흔히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이렇게 3남매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박재옥이라는 큰 딸이 있다는 것은 <제3공화국>에 의해 처음 알려진다.
박재옥은 박정희와 김호남이 결혼한 이듬해인 1937년 11월 24일에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박정희는 1936년 대구사범학교 시절, 3살 연하의 김호남과 결혼한다. 그런데 이게 본인이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령으로 억지로 한 결혼이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1950년에 이혼한다. 한때 김호남이 그 후, 여승이 되었다고 소문이 났지만, 절간에서 승려들을 위해 밥을 짓는 공양주 노릇을 하곤 했던 것이 잘 못 알려진 것이라 한다.
박재옥은 어렸을 때, 친척집을 전전하게 된다. 아버지인 박정희는 육영수와 재혼했고, 친 어머니인 김호남도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박재옥은 중학생 시절에는 사촌 오빠인 박재석에게 얹혀살았고, 고등학생 때에는 사촌 언니 박영옥ㆍ김종필 부부의 신혼집에 얹혀살면서 동덕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 무렵 육영수가 김종필의 집을 찾아와 박재옥을 노량진의 집으로 데려간다. 이때부터 계모와 함께 살게 되는데 사실 말이 계모 지, 두 사람은 겨우 12살 차다. 이 때문에 “어머니라고 부르기 쉽지 않았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래서 박재옥은 육영수 여사를 ‘어머니’보다는 주로 ‘육 여사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박재옥이 육영수 여사와 외모가 닮아서 그녀의 친척 동생인 줄 알았다고 한다. 연합뉴스
박정희도 박재옥이 큰 딸이라고 공공연히 밝히지는 않았고, 먼 친척처럼 조용히 살았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박재옥은 조용히 2층 방으로 올라가 있곤 했다. 신기하게도 육영수와 외모가 닮아서 주변 사람들도 박재옥을 육영수의 친척 동생쯤으로 알았다고 한다.
육영수는 미혼인 남자 장교들이 집을 방문하면, 박재옥에 대해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괜찮은 아가씨”라고 소개하며 넌지시 반응을 살폈다고 한다. 이후 동덕여자대학교에 진학했고, 대학교 재학 중, 아버지 박정희의 전속 부관이었던 한병기와 1958년에 결혼한다. 결혼 후, 박재옥 부부는 육영수의 친정을 방문하여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 등, 가족 대우를 받는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1963년에는 맏딸 박재옥은 이미 결혼하여 분가한 상태여서 청와대에서는 같이 살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 측에서도 영부인인 육영수가 낳지 않은 자식이 주목받는 일을 막기 위해 박재옥의 존재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재옥의 친모가 이혼하였더라도 엄연히 박정희와 정식 결혼한 아내였기에 그녀는 박정희의 적녀(嫡女)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훨씬 보수적이고 대통령이 이혼했다는 사실이 주목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재옥은 다른 동생들에 비해 숨겨진 듯한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큰 말썽 없이 무난하게 보낸다. 박정희가 1969년, 사위 한병기에게 케이블카에 대한 국가 사업권을 준 뒤, 1971년 이후부터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을 계속 운영했다. 일명 '권금성 케이블카'가 이것이다. 덕분에 경제적인 면에서는 불편함 없이 산 것 같지만, 정황상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해 줄 테니 조용히 살아라”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박정희는 3선 개헌 뒤, 쿠데타 동지였던 김종필과 사이가 멀어지면서 사위인 한병기를 정치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8대 국회위원 속초시 선거구에 공천을 받아 출마하여 당선하지만, 그다음 9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불출마하게 된다. 3선 개헌으로 장기 집권을 위해 사위를 정계로 진출시켰으나, ‘막상 큰 딸의 존재가 알려져 부담되었다’라는 것이 당시 언론의 해석이다.
박재옥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 18년 중,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지냈다. ‘조용히 살아라’는 묵언이 그녀를 평생 따라다녔지 싶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한병기는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의 보좌역으로 활동한다. 박정희의 3선 개헌으로 정치를 떠났던 두 동서 간이 만나 재개를 꿈꿨으나,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정치 규제를 당한다. 언론에서는 박대통령이 3선의 욕심이 없었다면 훌륭한 대통령으로 길이 평가받았을 것이고, 또한 김종필이 차기 후임자가 됐을 거라고 말한다.
박재옥은 서너 번 아버지의 추모식 등을 제외하면 일가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이복동생인 박근혜와는 관계가 불편했다. 2020년 7월, 84세의 나이로 박재옥이 세상을 떠나는데 그녀의 장례식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 한병기(1931 ~ 2017)는 1977부터 1980년까지 주 캐나다 대사를 역임한다. 그는 토론토 한인사회와도 인연이 깊다. 1970년대 말 토론토 한인사회의 숙원 사업이던 한인회관 건물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로부터 20만 달러(미화)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에글린턴(Eglinton)과 던밸리파크웨이(Don Valley Parkway) 근처에 단독 단층 건물을 구입해 한인회관을 마련하게 된다. 현재, 구 한인회관은 한마음선원(불교)으로 바뀌었고, 한인회는 1996년 회관을 현 위치(1133 Leslie St.)로 옮겼다.
한상훈 <구 한인회관 건립위원장>의 증언에 따르면 “한병기 대사가 토론토 방문 때마다 그와 친분이 있는 이영현 영리무역 사장과 함께하며 한인회관 건립 현황을 설명하였고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해 가을, 한대사는 본국 대사 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하면서 놀랍게도 20만 불을 가져왔다”라고 밝힌다.
아마, 그 기금은 박정희 대통령이 조용히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큰 딸에게 보낸 ‘그리움과 미안함의 몸짓’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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