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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초’는 철모르고 핀 꽃이 아니다.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Mar 06 2025 10:24 AM
나는 60세가 넘어서야 꽃이 눈에 들어왔고 즐기게 된다. 그리 바쁘지 않았던, 여성 호르몬의 비율이 높아지는 시기였지 싶다. 그리고 또 몇 해가 지나서야 흙을 만지고 모종을 심게 된다. 그렇다고 씨를 뿌려 싹을 틔울 정도의 애정과 솜씨는 없고, 겨우 모종을 사다가 화분에 나누는 정도다. 처음에는 무릎 꿇고 고개 숙이는 일과 아침마다 물 주는 것이 익숙지 않아 힘들었다. 하지만, 꽃 자라는 재미를 즐기려면 그 정도는 견뎌야 했다.
복수초(Adonis)는 눈이 녹고 다른 꽃이 피지 않는 이른 봄에 꽃봉오리가 땅을 뚫고 나기 시작한다. Adobe Stock
요즘처럼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언제 꽃을 보려 나’ 싶어, 봄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지난해 연초에는 무슨 바람이 들었었는지, 산악회에 가입해 매주 토요일 산행을 했다. 어느 날, 산행을 하다가 눈 속에 핀 노란 꽃을 보게 된다. 꽃이 피기에는 좀 이른 듯한데, ‘야, 이런 겨울에 꽃이 피다니’ 싶었다. 누군가 “이거 복수초 네”하며 반긴다. 나는 날씨가 워낙 변덕이 심하니 꽃들도 헷갈릴 수도 있지 싶었다. 하지만, 그 꽃은 철모르고 핀 꽃이 아니었다. 당시는 산악회 일행을 쫓아다니기도 힘든 때이어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지나 칠 수밖에 없었다.
흰 눈에 파묻힌 낙엽을 뚫고 나온 그 노란 야생화의 잔상은 오래갔다. 시간은 흘러 날이 풀리고 꽃 심는 시기가 됐다. 토론토에서는 5월 중순, 빅토리아데이를 전후해 꽃모종을 심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추위가 닥쳐 심어 놓은 꽃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스트코로 꽃모종을 사러 갔다. 이것저것 고르다가 가성비 좋은 노란 꽃모종과 다른 종류도 몇 개 더 골랐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꽃모종을 골라도 아내의 최종 심사를 거쳐야 한다. 꽃에 관해선 아내가 한 수 위고, 또 예산 집행권을 가지고 있다. 시집오기 전에 딴, ‘꽃꽂이 자격증’이 있다는 것도 나를 기죽게 하는 이유다. 하여튼 그날, 내가 고른 그 노란 꽃은 심사에서 떨어져 우리 집에 심어지는 행운을 못 누리게 된다.
며칠 전, 창밖의 눈을 보다가 문득 산에서 보았던 ‘눈 속의 노란 야생화’가 생각났다.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더니, 그것이 ‘복수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 꽃을 어디선가 보았지’ 싶었다. 어느 농부가 복수초를 기르는 방법에 대해 쓴 글을 읽는 동안 기억의 조각이 하나, 둘 맞춰졌다. ‘그래, 그때 코스트코에서 심사에 떨어진 꽃모종이 바로 복수초였네’ 하면서 말이다. 아마, 그 복수초는 야생화를 정원에 심을 수 있게 관상용으로 개종한 것이 아닐까 싶다.
복수초의 꽃말은 ‘영원한 행복’이다. 복수초(福壽草)는 복과 오랜 수명을 의미한다. Adobe Stock
복수초(Adonis vernalis, Adonis amurensis)는 눈이 녹고 다른 꽃이 피지 않는 이른 봄에 꽃봉오리가 땅을 뚫고 나기 시작한다. 크고 밝은 노란색 꽃은 이른 봄에 피었다가 초여름에 휴면기에 들어간다. 복수초는 줄기에 꽃이 한 개만 달리며 지름 3~4 센티미터로 노란색이며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복수초의 꽃말은 동양에서는 ‘영원한 행복’이란다. 복수초(福壽草)는 복과 오랜 수명을 의미한다. 복수초의 영어 이름은 아도니스(Adonis)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아닌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아프로디테(Aphrodite/비너스)가 사랑한 미소년이다.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아들 에로스(Eros/큐비드)와 놀다가 아들의 화살에 가슴을 찔려 상처를 입는다. 큐피드의 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지는 마법이 있는데,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미소년 아도니스를 보고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전쟁의 신인 아레스(Ares)는 아프로디테의 애인이었다. 그녀가 아직 어린, 미소년과 놀아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질투를 했다. 그는 아도니스가 혼자 사냥에 나선 것을 보고 거대한 멧돼지를 조종해 아도니스를 공격한다. 비명 소리를 들은 아프로디테가 달려가지만, 아도니스는 벌써 멧돼지의 날카로운 이빨에 옆구리를 찔려 죽은 뒤였다. 큰 슬픔에 빠진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가 흘린 피 위에 ‘신의 술(넥타르)’을 부었더니, 아네모네가 피어났고(혹은 복수초가 났다는 설), 아프로디테의 눈물에서는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아도니스는 세상을 떠난 후, 다른 인간들처럼 명계(冥界/하네스/지하세계)로 간다.
복수초에 대해 여기저기 뒤적이다, 정지용 시인의 <노인과 꽃>이라는 글을 읽게 된다. 작가는 ‘꽃을 심는 노인’을 보고 무척 감동받는다. “꽃을 심는 노인은 꽃처럼 아름답다. 어떤 노인들은 늙어서도 여자를 밝히는데, 오로지 꽃만 사랑하는 노인은 거룩하다. 힘들게 심은 꽃은 결코 헛되지 않고 꽃을 피울 것이며, 노인의 남은 생애와 죽음을 장식할 게다. 그러나 미숙한 청춘을 보낸 노인은 고작 죽음 따위에 슬퍼하지 않는다. 사실 청춘은 꽃을 사랑하기보다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위해 꽃을 꺾기나 할 때다. 훗날 나도 노인이 되면 남은 생애를 꽃을 키우겠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지용 시인은 ‘꽃을 심는 노인’이 되어 보지도 못하고, 48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는다. 시인은 1902년에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나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한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고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되었다고 한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아~’라는 <향수>,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의 <호수>가 그의 대표 작품이다.
1988년 그의 시가 해금되기 전까지 정지용이라는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금기의 대상이었다. 그가 납북되던 중, 소요산 부근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고, 자진 월북한 후에 숙청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확실한 최후는 명확하지 않다.
‘노인이 되면 꽃을 키우겠다’는 말에 시인의 모든 것이 녹아 있다. 마음만 열면 소박한 꿈을 이룰 수 있는데, 그 조차 쉽지 않은 것이 세상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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