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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기술로 집 사고, 미군에 납품해 떼돈
김미선 교수 ‘여사장의 탄생’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Mar 16 2025 11:40 AM
6·25 전쟁 이후 대거 등장한 여사장 ‘드센’ ‘나대는’ 수식어 써가며 배제 50년 전에도 일·육아 고민은 여전 “한국경제사 여사장의 존재를 기록”
일제강점기 때 서울(당시 경성)에서 일하던 1세대 미용사 임형선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맨몸으로 내려간 부산에서 가족을 건사한 건 그의 미용기술이었다. 서울에서 피란 온 부잣집 여성에게 매일같이 머리를 해 주며, '파마약'(퍼머넌트 웨이브 제품)을 개발하고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만들었다.
"석 달 일하니까, 용두산에 하코방 판잣집이 사지더라고. 방 두 개, 부엌 하나 있는 거 사지더라고. 교수들도 부둣가에서 노동을 하는 판에. 일개 미용원 주인이 석 달 일하고 용두산에 집 산다는 거는 이거는 아주 굉장한 거예요." 임형선의 성공담은 1950~60년대 여성지에 단골로 등장한다.
경제사서 지워진 여사장들
김수용 감독의 1965년 영화 ‘날개 부인’에는 밀수품 장사를 하는 부인이 등장한다. 물자가 귀한 전후 사회의 많은 여성들이 밀수품 또는 미군을 통해 흘러나오는 양품을 판매해 생계를 유지했다.
여사장은 한국경제사에서 잊힌 존재다. 한국경제사가 국가 경제, 그중에서도 수출에 초점을 맞춘 탓이다. 여성노동사에서조차 산업화 시대의 임금노동자, 주로 공장노동자에게만 연구가 집중됐다. 정부가 진행한 당시 '노동력조사'에 따르면 1955년 여성 자영업주는 44만2,000명이었고, 1966년엔 57만 명이었다.
책 '여사장의 탄생'은 이렇게 이중으로 배제됐던 한국경제사의 여사장들을 불러 모은다. 저자인 김미선(48)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학술연구교수는 8일 한국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자기 고용(self-employed)'이란 형태로 경제활동을 했던 많은 여성들이 왜 주목받지 못했는지 의문이 들었다"며 "자신의 능력과 존재를 증명하며 사업체를 운영한 여성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이들이 어떻게 비가시화되고 삭제됐는지를 알리고자 했다"고 책을 쓴 이유를 밝혔다.
"집안일은 제대로 하고 있니?"
여사장의 탄생·김미선 지음·마음산책 발행·252쪽·1만7,000원. 표지 사진은 '윤보석사'를 운영했던 여사장, 윤교순 사장이다.
책에는 여러 여사장의 구술 인터뷰가 수록돼 있다. 여사장이 대거 등장한 시기는 한국전쟁 때였다. 남성은 전쟁터로 떠나고, 아이와 남은 여성은 폐허와 혼란 속에서 먹고살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가장 흔했던 게 기술을 이용해 미용실, 양장점 등 영세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시장에서 평소 잘하는 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시장이 여성들의 공간이 된 것도 이 시기다. 개중엔 남성들과 경쟁해, 미군 부대의 포로복 납품 사업권을 따낸 여사장(이종수)도 있었다. 그는 이때 번 돈이 "미군 지프차에 한가득 실어 나를 정도였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호의적이진 않았다. '기가 센' '드센' '나대는'이란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었다. 김 교수는 "가정에서 애 키우고 살림하는 것이 본연의 역할이라는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 아래 여성들 본인조차 집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들은 '집안일은 제대로 하고 있니' 혹은 '여자답지 못하다'는 식의 언어들에 시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일, 육아 양립은 여사장들의 오랜 고민
'여사장의 탄생'의 저자 김미선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학술연구교수. 마음산책 제공
반세기 전 여사장들에게도 일과 살림(육아)의 병행은 화두였다. 1960~80년대 큰 규모의 봉제완구 사업체를 운영한 이상숙씨 역시 "회사 일하고 가정 일하고, 가정의 아이들 문제, 이런 거를 케어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며 "사업과 가정을 모두 책임져야만 한다는 버거움 때문인지 꿈을 꾸면 나는 항상 보따리 두 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여사장들이 운영하던 작은 규모의 점포들이 대개 살림채와 붙어 있던 것도 일과 살림을 좀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김 교수는 현대 많은 여성들이 임금노동 대신 창업을 선택하거나 공간 제약 없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해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이런 맥락과 유사하다고 본다. 그는 "여성들이 집에서 육아와 살림을 하면서 돈을 버는데 SNS라는 플랫폼이 최적화된 것으로 보인다"며 "전쟁과 산업화를 거친 여성 자영업자의 이야기가 일과 육아의 양립이 어려운 현대 여성들과 공명하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송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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