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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벨리니의 고향 시칠리아 카타니아
손영호 | 칼럼니스트/국제펜클럽 회원
- 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 Mar 13 2025 09:10 AM
■ 카타니아(Catania)와 에트나(Etna) 화산
카타니아(Catania)는 시칠리아의 주도(州都) 팔레르모(Palermo)에 이은 제2의 도시로, 메시나와 시라쿠사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기차 또는 자동차로 약 1~2시간 거리에 있는 에트나 화산이 어디서나 보이는데, 지형이 화산지형이라 도시 건물들이 대부분 어두운 잿빛에 가까운 검회색의 용암으로 건설되어 매우 이색적이다. 또한 콜로세움 등 로마 시대 유물도 곳곳에 숨어있다. 매년 2월5일에는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녀 아가타 (Santa Agatha)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
에트나(Etna) 화산은 해발 3,350미터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 일행 중 일부가 에트나 분화구를 보기 위해 메시나(Messina)에서 타오르미나(Taormina)로 갔으나 비가 와서 중도 포기하고 돌아왔다.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 1912~2007) 감독이 연출한 "모험(L'Avventura, 1960)"이란 영화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정사(情事)"라는 묘한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마지막 장면에 모니카 비티(클라우디아 역)가 마침내 가브리엘 페르체티(산드로 역)의 머리를 보듬고 연민과 위로의 정으로 감싸 주면서 그의 충동적인 외도를 용서한다. 저만치 이마에 만년설을 이고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에트나 산을 증인인 양 응시하면서….
아무 것도 신뢰할 수 없게 된 인간의 의식(意識), 소외와 고독, 사랑의 부재(不在) 등 우리가 상실하고 있는 내면의 감성을 엄격한 기하학적 구도 디자인을 통해 시각적으로 나타낸다. 이른바 '영상 언어(visual language)'를 통해 현대인의 상실된 정서를 되찾는 '새로운 모험의 인간관계’가 필요함을 강조한 수작이다.
■ 빈첸초 벨리니의 고향 카타니아
카타니아는 오페라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가 태어난 곳이자 묻힌 곳이다. 벨리니는 도니체티, 로시니와 함께 벨칸토 오페라의 중심적인 작곡가로 평가된다.
'벨칸토(Bel Canto)'는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으로 1800~1850년의 기간에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오페라를 말한다. 우선적으로 인간의 감정표현을 중시하고 인간의 목소리와 선율을 중요시하는 이탈리아 오페라 음악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벨칸토 창법으로 유명한 그리스 출신 프리마 돈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가 부른 벨리니 작곡의 "노르마(Norma)"에 나오는 아리아 "정결한 여신(Casta Diva)"은 최고로 꼽힌다.
벨칸토 3인방이라고 불리는 빈첸초 벨리니, 가에타노 도니체티(1797~1848), 조아키노 로시니(1792~1868)는 거의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다. 세 사람 중에서 로시니가 가장 먼저 태어났고 로시니보다 5년 후에 도니체티가 태어났으며 도니체티보다 4년 후에 벨리니가 태어났다.
그러나 벨리니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겨우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해적’ ‘노르마' '몽유병의 여인' ‘청교도’ 등 가장 아름다운 주옥같은 오페라들을 남겼다. 도니체티는 51세에 세상을 떠났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같은 비극적인 오페라와 '사랑의 묘약'과 같은 코믹한 오페라에서 모두 뛰어났다. 로시니는 가장 먼저 태어났지만 장수하여 76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비야의 이발사' '윌리엄 텔'과 같은 주로 코믹한 내용의 오페라들을 남겼다.
벨리니는 화려하고 강렬한 로시니와 도니체티의 음악과 달리 섬세하고 정교하며, 긴 호흡을 바탕으로 유려하고 우아한 선율로 유명하다. 또한 관현악 규모와 상관없이 성악 멜로디가 돋보이도록, 멜로디를 극대화한 작곡기법을 사용하였다.
벨리니는 1835년 9월23일 오후 5시에 파리에서 운명했다. 그의 사망 직후 로시니가 즉시 장례절차와 묘지뿐만 아니라 재산관리까지 계획하는 등 헌신적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우선 왕의 직접 하명에 의해 왕실 주치의인 저명한 닥터 달마스에게 부검(剖檢)을 의뢰했다. 달마스의 부검 결과에 의하면 사망 원인은 급성 장염으로 심각한 이질(痢疾) 증상을 유발했고 급기야 간 농양(肝膿瘍) 합병증을 일으킨 때문이라고 밝혀졌다.
로시니는 곧 파리음악가위원회를 구성하여 묘비 설립 및 10월2일 앵발리드(Hotel des Invalides) 교회에서 치를 장례미사 비용을 모금하였다.
▲ 카타니아 대성당에 있는 빈첸초 벨리니의 무덤.
또 한편 로시니는 9월27일, 10월3일 두 번에 걸쳐 팔레르모에 있는 로마 가톨릭 교구장에게 편지를 보내 벨리니의 죽음과 그 직후에 조치했던 내용과 장례미사 등의 내용을 자세히 알렸다.
로시니는 일단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Pere Lachaise Cemetery)를 장지로 택했다. 그 당시 유명인들의 묘지로 유명한 곳이라 먼저 안장한 다음 만일의 경우, 예컨대 영원히 묻힐 장소가 정해질 경우에 대비하여 단기적인 안치소로 생각한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조치였다. 결국 사후 41년이 지난 1876년에 그의 출생지인 카타니아의 대성당으로 봉환되었다.
페르 라셰즈 묘지에는 1839년에 정교하게 건립된 벨리니 묘비가 그대로 있다. 또한 로시니도 1868년 벨리니의 이웃 묘에 묻혔으나 1887년 유골이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 봉환된 후 묘비만 남아 있다. 말하자면 가묘(假墓)가 된 것이다.
벨리니의 유품들은 카타니아의 벨리니 박물관(Museo Belliniano)에 보존돼 있다. 또한 유로화가 통용되기 전인 1980, 1990년대 사용되던 5천 리라 지폐의 전면에 그의 얼굴이, 그리고 뒷면에는 그가 작곡한 오페라 '노르마'의 장면이 삽입되었었다.
▲ 조각상 중간에, 벨리니 작곡의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La Sonnambula)"에서 주인공 아미나의 마지막 아리아 대사 중 일부가 악보와 함께 새겨져 있다.
벨리니의 무덤이 있는 카타니아 대성당의 조각상 중간에, 벨리니 작곡의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La Sonnambula)"에서 주인공 아미나(Amina)의 마지막 아리아 대사 중 일부가 악보와 함께 새겨져 있다. "Ah! non-credea mirarti / Sì presto estinto, o fiore" (아! 너를 볼 수 없다니 믿을 수 없네 / 이렇게 빨리 시들어버리다니, 꽃이여!)
얘기가 났으니 이 가사의 뒷부분은 이렇다. "Passasti al par d'amore / che un giorno sol durò.” (사랑이 지나가버림과 같이, 오직 하루뿐이었네.)
이 대본을 쓴 펠리체 로마니(Felice Romani, 1788~1865)는 추도사에서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나는 벨리니 같은 작곡가를 만나기 위해 15년을 땀흘려 찾았다. 그러나 단 하루만에 그를 잃었다."
벨리니가 죽기 전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1835년 여름, 파리의 어느 만찬행사에서 독일 시인이자 작가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하이네가 벨리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넨 천재야, 벨리니. 그러나 위대한 재능은 조기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지. 모든 위대한 천재들은 아주 젊었을 때 사망했거든, 라파엘이나 모차르트처럼 말이야."
이 일로 인해 벨리니는 하이네를 멀리 하게 되었는데, 만찬행사에 참석했던 화가 마담 주베르(Madame Joubert, 1797~1834)가 화해시킬 목적으로 친구인 벨조이요소 공주(Princess Belgiojoso, 1808~1871)와 함께 두 사람을 식사 초대했다.
그러나 벨리니는 오질 않았고 대신 쪽지가 전달됐다. 몹시 아프다는 이유였다. 이에 공주가 그녀의 주치의 루이지 몬탈레그리를 벨리니 처소인 퓌토(Puteaux)로 보냈다. 주치의는 13일 동안 네 번 보고를 했는데, 세 번까지는 점점 호전되는 것으로 알렸으나 9월22일 마지막 보고에서 갑자기 상태가 악화돼 임종이 가까웠다고 알렸다. 결국 화해는 이뤄지지 못했고 ‘재사박명(才士薄命)’이라는 하이네의 말이 씨가 되었는지 벨리니는 다음날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벨리니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와 절친인 프란체스코 플로리모와의 동성애(?)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결혼은 그의 작곡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소심한 성격 탓이라는 얘기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주디타 투리나(Giuditta Turina)라는 유부녀와 제노아, 밀라노 등지에서 사랑을 나눈 적이 있는데, 그녀는 남편과 이혼을 해서라도 따라나서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작곡이 인생의 전부라며 냉정하게 거절해 버렸다고 한다.
천재는 갔어도 "노르마" 중 유명한 아리아 ‘정결한 여신’은 “한여름밤의 꿈(1999)”,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로렌조 오일(1992)” 등 많은 영화에 삽입되어 오늘날에도 우리 속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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