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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Mar 26 2025 04:59 PM
토론토로 갓 이민 왔을 때, 한인 커뮤니티에서 주최하는 콘서트나 교회 음악회 등에 가면 자주 보게 되는 사람이 있었다. 큰 중절모에 정강이까지 내려온 긴 트렌치코트를 입고 곱슬거리는 은빛 머리, 훤칠한 키에 벌어진 어깨. 칠십이 넘어 보이는데 허리도 꼿꼿하고 한눈에 봐도 내공이 있어 보였다. 기름기 없는 얼굴에 검버섯이 피었고, 투박한 허스키에 경상도 말씨를 쓴다. 공연이 끝나면 객석 입구에서 출연자나 관계자들과 이런저런 이바구를 하는데, ‘아, 저 예술가 같은 분은 누굴까?’ 궁금했다.
어느 날, 마침 함께 공연을 보러 간 선배에게 “저기 도사 같은 분, 혹시 아세요?” 하고 물었더니, “한인 사회에서 유명한 이동렬 교수인데, 여태 몰랐나?”며 간단한 이력을 알려 주었다. 그렇게 이 교수에 대해 알게 됐고, 그 뒤 <캐나다 한인상 위원회>라는 단체에서 함께 봉사도 하게 된다.
이동렬 교수도 나름 나에 대해 궁금했던지, 만날 때마다 ‘가끔 쓴 칼럼을 보았다’며 출신과 나이, 친하게 지내는 동무, 취미 등을 묻곤 하셨다. 지난해에는 ‘제가 수필집을 냈습니다’하며 책을 보내 드렸더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하며 당신의 책 3권을 손수 사인까지 해서 보내왔다.
이 교수는 1940년생이다. 나이도 있고 건강 때문인지 2020년에 집필한 수필 <거꾸로 간 세월>에서는 ‘생애에 마지막 에세이’라며 아쉬워했는데, 그 뒤에도 책 두 권이나 더 내셨다. 20 번째 출판이라며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라며 쓴 수필이 <감장새 작다하고>다. 책을 내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책 한 권 출간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20권이라니… 흔히들 남정네의 4대 내공을 감옥, 이혼, 암, 부도라고 하는데, 나는 ‘출간’을 더하고 싶다.
이동렬 교수의 책 제목은 대개 간결하다. 그래야 독자들이 기억하기 쉽다. 그런데 ‘감장새’가 뭐지? 사전을 찾아봐도 감장새는 없다. 그의 책 102쪽에 답이 있었다. 글을 읽어 보고 시조도 다시 보았다.
“감장새 작다 하고 대붕아 웃지 마라 / 구만리장천을 너도 날고 저도 난다 / 두어라 일반 비조(飛鳥)니 네오 제오 다르랴”
시조를 보면 두 마리 새의 비유다. 이 교수의 풀이를 보고 ‘감장새’가 ‘굴뚝새’라는 것을 알았다. ‘대붕’(大鵬)은 단숨에 9만 리를 날고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상상의 새라고 한다. 이어지는 궁금은 ‘그럼 굴뚝새는 어떤 새지?’
감장새는 굴뚝새를 말한다. 날개가 짧고 둥글며 몸길이 9~10㎝, 등은 다갈색이고 가슴에 검은 가로 무늬가 있다.RSPB 홈페이지
굴뚝새에 대해, 윤순영(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의 글을 참조해 정리해 보았다. 수컷 굴뚝새는 한자리에 앉아있지 않고 짧은 꼬리를 위로 바짝 추켜세운 채 ‘탁! 탁!’ 치며 온몸을 움직인단다.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지저귀거나 강렬하고도 달콤한 목소리로 커다랗고 시끄럽게 노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꼬리를 치켜세우는 것은 영역을 알리는 과시이자, 작은 몸집의 약점을 당찬 허세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행동으로 보인다. 짧은 거리를 신속하게 날아다닌다. 날개가 짧고 둥글며 몸길이 9~10㎝의 매우 작은 새이어서 정말 앙증맞다.
굴뚝새는 일부다처제로 번식한다. 수컷은 둥지의 기초공사를 마치고 해가 뜨기 무섭게 지저귀며 암컷을 유혹한다. 암컷이 세력권 안에 들어오면 둥지로 유혹하고 꼬리를 치며 정열적인 몸짓을 보인다. 쉬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순찰해야 하는 것은 일부다처제를 꾸리는 수컷의 숙명이다. 짝짓기를 마치고 얼마 후 알을 낳아 품게 되면 기르는 것은 주로 암컷의 일이다. 수컷은 또 다른 암컷을 아름다운 소리로 유혹한다. 능력이 뛰어난 수컷은 여러 마리의 암컷과 신방을 차린다. 자신의 영역에서 번식하는 4마리 정도의 암컷과 함께한다.
굴뚝새는 고국의 전역에 사는 텃새로 등이 다갈색이고 몸 아래쪽은 붉은 회갈색, 가슴에는 검은색 가로무늬가 있다. 여름에는 산지를 좋아해 그곳에서 번식하며 생활하지만, 겨울에는 인가 주변으로 내려온다.
1960~70년대 흔했던 바람둥이 굴뚝새는 우리와 더불어 살아온 ‘정서 동물’이었다. 지금은 아파트 촌에 밀려 들이나 산으로 가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신당동 <수도국산>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많이 살았다. 저녁해가 지면 새들이 집 처마나 굴뚝에 날아와 있다가 어느 틈엔 가, 마당에 있는 먹이를 채어 날아 가곤 했다. 아마, 그때 보았던 무리 중에 굴뚝새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동렬 교수의 <감장새 작다하고>는 ‘생애 마지막 수필집이다’라고 한다. 그동안 20권의 책을 출간하셨으니, 그 내공을 짐작케 한다.
다시, ‘감장새 작다하고’의 시조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위 시조는 이택(李澤)이 지었다. 숙종 때 무인으로 전라좌수사와 평안병사 등을 지냈고, 삼사 관원(三司管院)인 홍문관(弘文館)의 부제학과 예조 참판(參判)을 했다.
부제학은 홍문관의 업무를 총괄하는 외에도 왕의 학문 연찬과 역사 편찬, 교서 제찬에 참여하였다. 또 삼사관원의 일원으로서 언론 활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의 저명한 고관 문신인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이 모두 부제학 출신이다.
삼사관원은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합하여 부른 말이다. 언론삼사(言論三司)라고도 하였다. 이들의 업무는 지금으로 치면 기자나 검사와 비슷하다. 왕과 대신들을 비판하고 견제하여 정치적 사회적 공공성을 추구한다. 당시 언론이란 표현은 지금의 언론과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각 기관의 역할을 살펴보면 왕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을 견재하기 위한 기능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현대의 언론 기능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삼사 기관은 독자적으로도 언론을 행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삼사가 합하여 왕의 허락을 받을 때까지 끈질긴 언론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들의 언론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삼사의 관원들이 일제히 대궐 문 앞에 부복하여 왕의 허락을 강청 하기도 하였다. 조선 선비들은 왕권의 독재와 전제를 막기 위해 이런 사정 기관을 만들어 상서도 올리고 진언을 했던 것이다.
이택도 숙종에게 ‘감장새 작다하고’를 통해 ‘아뢰옵기 황송하오나…’를 올렸지 싶다. 요즘 고국의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들이 벌이고 있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외침은 벌써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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