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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인 노년의 삶을 위하여”
품격있는 국가 정책 세워야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pr 27 2025 02:52 PM
“걱정 마세요. 우리 덕수는 자기가 뭐든 다 책임진대요.”
영화 ‘국제시장’은 덕수 어머니의 말로 시작한다. 가슴속 깊이 남는 한 장면이 있다. 어느덧 노인이 된 주인공 덕수는 광복과 전쟁, 산업화의 격동기를 묵묵히 버텨낸 삶을 돌아보며 조용히 말한다. “그저, 가족 잘 지키면 된 거지 뭐.” 그 세대의 노인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노인은 이제 자신의 노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마주하고 있다.
Adobe Stock.
2023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의 18.4%, 기대수명은 83.6세로 늘어났지만, 건강수명은 66세 내외로 긴 유병기간을 지니고 노년기를 맞이하게 된다. 오래 살게 된 만큼 ‘건강하게, 의미 있게’ 사는 노년이 현재 한국사회의 핵심과제가 되었단 뜻이다.
65세 이상 노인에서 만성질환 평균 개수는 2.6개에서 3.1개로 증가했고, 노쇠군 비율도 23.1%로 심각한 수준이다. 노인의 약 40%가 5개 이상의 약제를 복용, 다약제 문제도 현실화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이 건강하다고 여기는 노인의 주관적 건강 인식 비율이 41.7%에 이른다는 점, 규칙적인 운동 실천율의 상승은 숫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한국 노인의 적응력과 내면의 힘을 보여준다.
과거의 노년이 ‘쉼’과 ‘가족의 품’을 상징했다면, 오늘날의 노년은 더 복합적이다. 상대적 빈곤율(중위소득의 50% 이하·43.9%)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며, 우울증상을 앓고 있는 이는 27.2%에 달한다. 그러나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 비율(52.9%)도 날로 급증하고 있다. 삶의 질과 마무리에 대한 철학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그만큼 사전연명의료계획(ACP), 웰다잉 정책, 노인 돌봄의 철학적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노인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가 아니라 ‘노인이 어떻게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인가’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 노인 정책은 건강한 노화를 위한 돌봄, 즉 단순 진료를 넘어선 노쇠 예방 프로그램, 약물 조정 서비스, 운동과 식생활 지도가 지역 중심으로 확산돼야 한다. 고립 없는 삶을 위한 방문 돌봄, 집안일을 해결할 수 있는 공동 주거형 노인 주택 활성화, 노인정‧복지관 등이 확장된 커뮤니티센터를 통해 혼자 사는 노인도 함께 사는 삶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적절한 노인 일자리 매칭 프로그램 다양화를 통해 경제적 여유뿐 아니라, 노년기에도 사회에 기여하는 역할과 의미의 회복이 필요하다. 정신적 평온과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치매 예방과 조기검진, 사전연명의료계획의 활성화, 심리 상담 확대도 필수다.
덕수처럼 오늘의 노인도 가족을 지키고, 나라를 일으키고, 세월을 견뎌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적 헌신이 아니라 고요하지만 주체적인 노년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돌보며, 스스로 만족하는 삶, 그것이 가능하도록 정책은 물처럼 부드럽고 뿌리처럼 깊어져야 한다.
노년은 축소된 삶이 아니다.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시기이며, 사회 전체의 품격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영화가 그것을 기억하듯, 정책도 그 품격을 지켜야 한다. 단순히 늙은 인구를 관리하는 것을 넘어 ‘잘 사는 노년’에 대한 국가 차원의 혁신 전략이 절실하다. 예방적이고 통합적인 고령화 대응만이 다가오는 100세 시대를 품을 수 있다.
이은주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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