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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기 失鄕記
이동렬 | 수필가, 웨스턴온타리오대 명예교수
- 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
- May 12 2025 10:12 AM
내가 자란 역동집의 ‘역동’이란 말은 ‘시골중의 시골’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세상과는 동떨어진 마을입니다. 하루종일 있어야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 멀리 산 넘어 옹천에서 서울행 기차가 떠나는 기적 소리를 빼면 소리라고는 도대체 없는 한적한 시골에 있습니다.
옛날 우리집이 들어선 자리에는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적은 듯 빌어다가…”와 “한 손에 막대 쥐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로 시작되는 늙음을 탄식하는 노래 2수의 저자로 알려진 역동易東 우탁 선생인 살았던 곳입니다. 역동 선생을 흠모하던 퇴계 이황이 이곳에 서원을 세울 것을 주창, 처음으로 역학을 조선에 소개한 사람의 호를 따라 역동서원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때 그 서원이 헐리게 되어 내 고조부가 그 자리에 우리집을 지었다 합니다. 향교나 서원이 헐린 자리에 개인집을 짓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의 5대조 할아버지가 ‘억지’를 부려서 우리집을 짓게 되었답니다.
내가 들은 ‘억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퇴계의 집 큰 종손네와 무척 가까운 편인데, 퇴계종가에서 양자를 들일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 5대조 할아버지 형님이 종가로 양자를 가게 되었답니다. 그때 막강한 새 세력을 얻은 고조부는 억지를 부려서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역동서원이 헐린 자리에 새집을 짓게 된 것이 우리집입니다. 조선시대때는 “예안”하면 무슨 큰 세력이나 되는 줄 알고 공연히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다네요.
내가 고향집을 떠난지 꼭 60년이 넘었습니다. 그 사이에 어머님과 아버님, 형님 두 분과 누나 두분이 돌아가시고 나와 내 여동생이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지요. 어릴 때는 왕왕거리고 북적대던 집이 이제는 빈집이 되어 무서운 정적만 감도는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언스플래쉬
면 소재지 예안읍이 물 속에 잠겼으니 내가 다니던 예안초등학교도 물 속에 들어갔습니다. 풍광을 자랑하던 역동집은 2번이나 옮겨 지었기 때문에 시나브로 애처러운 고가가 되고 말았지요. 집주위로 빙 둘러섰던 운동장 크기의 4배가 되는 소나무들도 다 베혀지고 거기에 살던 수백 마리의 백로들도 다른 데로 살 곳을 찾아 갔습니다. 나는 내 고향집을 갈때마다 집 앞을 고요히 흐르던 낙동강의 옛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러나 고향을 찾는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나도 모르게 조금씩 새로운 모습에 적응되어가는 것도 모르고 그저 마음 속으로 느끼는 감정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그 산하가 조금씩 내게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너무 오래 되어서 내 기억이 마멸된 것도 많지요.
내가 다니던 청고개 길로 이어진 예안초등학교는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신사원 교장선생님이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시멘트 계단으로 된에 단에 올라 전교생들에게 훈화하시던 그 반원형 교단은 심한 가뭄이 들면 그 모습을 들어 냅니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그 단 앞에 펼쳐진 운동장에서 나는 첫 가을 운동회날 난생 처음으로 나가서 6명이 한 조가 되어 뜀박질을 했는데, 내가 꼴찌를 한 기억이 납니다. 유니폼이란 말도 없던 시절, 한복에 대님, 검정 고무신까지 신고 뛰었으니 그 꼴지도 지금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나는 텔레비전 프로<이만갑(이제 만나러 갑니다)>을 열심히 봅니다. 출연자 대부분이 목숨을 걸고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중국과 동남아 여라나라를 거쳐 고생 고생 끝에 한국으로 온 열혈 청년들과 젊은 여성들입니다. 그들이 북한에서 붙들리는 날에는 평생 감옥살이를 할 위험이 있지마는 자유를 그리워하는 욕구는 이 위험을 이겨냈지요. 이들이 자기 고향을 떠날 때는 “고향아 잘있거라, 내가 다시 너를 보러 오겠노라”하는 맹세를 하고 떠났을 것입니다. 이 자유천지에 와서 누가 북한 이야기를 꺼내거나 자기 고향에 관한 말만 하면 유치원 아이들처럼 귀를 쫑긋, 관심도가 높아져갑니다. 이를 보면 우리 문화권에서는 고향은 우리를 품고 있는 어머니의 가슴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고향을 배반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요. 있다고 하면 천의를 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겠지요.
나의 실향기는 내가 고향을 직접 찾아가서 보고 느낀 것이 그 동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고향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없이 몇 10년을 그대로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역동 내 고향은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갑니다. 그러니 이 실향기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슬픔이라기 보다는 ‘실향기’ 이전의 고향,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나게 된 산천에서 오늘날의 폐허가 된 슬픔을 적은 ‘비망록’이요, 망향의 넋두리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이동렬 | 수필가, 웨스턴온타리오대 명예교수
The article is funded by the Government of Canada through the Local Journalism Initiative 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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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라 기자 (press1@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