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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김외숙의 문학카페
- 박해련 인턴기자 (press3@koreatimes.net)
- Jun 05 2025 11:11 AM
사람은 태어나 말 배우면서 질문을 시작한다.
‘이거 뭐야?’ ‘왜?’라는 것은, 특히 부모가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자녀들이 하는 아이다운 질문이다. 아이들이 유독 질문을 많이 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처음이어서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눈으로 마주하는 첫 대면의 낯섦을 ‘뭐야?’ 또는 ‘왜?’란 질문으로 접근하는 자녀들이 바르고 풍성한 지식의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어른들은 적절한 답을 주려고 하고 그것은, 알고 싶은 것 많은 아이에게는 나침판 같은 의미가 될 수 있다. 바르게 알고 바른길을 가도록 안내하기 때문이다.
이 나이의 나도 요즘,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내 인생의 여느 때보다 많이 받는 이 질문은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변화로 인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종의 호기심이기도 하겠는데 그것은, 내가 혼자가 되면서 받는 질문으로, ‘한국엔 안 돌아갈 건가요? 혼자 거기서 살려고요?’’라는 등의 것이다.
‘친구들 여기 두고 거기서 계속 살 거야?’란 것은 서울에 사는 친구들이 하는 질문이고, 내가 아는 어느 분은 통화할 때마다 ‘안 갈 거지?’라며 확인하고, 이웃들은 ‘외숙, 떠날 거야?’하고 묻는데, 그 모두가 나름의 관심이고 인정의 표현임을 나는 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궁금하다, 사람들은 왜 내가 떠날 것이라 지레짐작할까, 하고.
내 거처 변화의 가능성을 두고 이러한 질문을 받을 때는 동시에, 오래전에 내 짝이 내게 한 질문도 떠올린다.
이곳으로 터전을 옮겨온 후 낯섦을 이기지 못해 머리맡에다 마음의 보따리를 두고 살았던 그때였다. 사람도, 언어도 관습도 문화도, 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서 마음 붙일 데가 없던 때였는데, 오래 지켜보던 짝이 어느 날, ‘그렇게 가고 싶다니 그래, 가거라 하고 내가 보낸다면, 정말 갈 거야?’란 말이었다.
여차하면 들고 나설 보따리를 머리맡에다 둔 심정이었는데, 그 말 앞에서 나는 보따리 생각은 접었다. ‘가지 마.’라며, 팔 잡은 손아귀의 힘보다 더 강렬하게, 간절하게 붙잡는 것 같던, 그 푸른 눈의 역설적인 질문 때문이었다.
스무 해가 더 지난 지금, 이제야말로 보따리 챙겨 공항으로 간다고 해도 붙잡을 사람 없고, 보따리 안고 주저할 이유 또한 없는 이 시점에, 다시 수많은 질문을 받으며 나는 내 짝의 질문의 그때를 또 생각한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하고.
뿌리 내리지 못해 흔들렸던 내게 ‘그’란 사람은, 내가 믿고 따라도 되던 나침판이란 사실을 내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붙잡아 줄 줄 알았기에 툭하면 간다고 어깃장을 부렸을 것이다, 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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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떠나온 그곳보다 더 편한, 붙잡아 주던 사람도 밀어내는 사람도 없는 이 집에서, 날 아는 사람들에게서 ‘너, 갈래, 말래?’란 의미의 질문을 받으면, 나는 도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넌 어쩌고 싶은데?’ 하고.
솔직히 이 나이에도 잘 모르는 것 한둘 아닌 나는, 나의 푸른 나침판부터 찾는다, 마치 그가 내 곁에 있었을 때처럼. 그는 내게 옥스퍼드 사전이었고, 도깨비방망이였고, 무엇보다도, 태평양 건너고 북미 대륙 가로질러 지금까지 한곳에서 안전하도록 인도한, 미더운 나침판이었으니까.
‘외숙은 이미 나침판을 지니고 있어. 이제부터는 그 나침판만 믿고 가면 돼.’
거처를 두고 질문이 분분한 이때, 여태 나침판 그늘을 잊지 못하는 나를 향해 ‘그’라면, 분명 그렇게 말해 줄 것이다.
어디서든 잘 살 것이라는, 나를 가장 잘 알 ‘그’가 나 대신 들려줄,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김외숙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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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련 인턴기자 (press3@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