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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악 마법사는 물리쳤지만
나를 억압하는 ‘진짜 빌런’은 무대 위에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un 19 2025 11:05 AM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매튜 본 ‘백조의 호수’ 지그프리트 왕자·오데트 공주의 사랑 그려 차이콥스키 사후 새 안무로 재평가 받아 ‘선과 악’ 이분법 구도로 긴장감, 주제 부각 전통 안무 기본으로 각 발레단 다른 결말 갈등 이끄는 외부의 적을 내면으로 끌어와 계급·권력·자아·욕망 등 다양하게 변주 유니버설발레단 내달 19~27일 예술의전당 매튜 본 ‘백조···’ LG아트센터서 18~29일 초연 후 150년간 이어온 질문 새롭게 해석
호숫가에서 아름다운 공주를 만난 밤. 그것은 왕자에게 사랑이 아닌 비극의 시작이었다. 마법사의 저주로 공주는 낮에는 백조로 변한다. 헌신적 사랑만이 마법을 풀 수 있는 주문. 영원할 듯 보였던 왕자의 사랑 서약은 오래가지 못 했다. 공주와 똑 닮은 마법사의 딸은 너무 유혹적 존재였기에.
유니버설발레단 '백조의 호수'의 한 장면. 지그프리트 왕자가 오데트와 닮은 흑조 오딜에게 사랑을 고백하자 귀족 변장을 한 마법사 로트바르트가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모름지기 사랑이란 가로막는 장벽이 있을 때 더 애절해지는 법. 고전 발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백조의 호수’는 비극적 사랑 이야기다. 지그프리트 왕자와 백조가 되는 마법에 걸린 공주 오데트. 둘 사이를 마법사 로트바르트가 방해한다. 순수와 사랑이라는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파괴하려는 절대악이다.
‘백조의 호수’는 졸작이었다?
마리우스 프티파(왼쪽)와 레브 이바노프. 위키미디어 커먼스
“볼쇼이 극장에서 이보다 더 형편없는 공연은 본 적이 없다.”
‘백조의 호수’는 전 세계 발레 팬에게 사랑받는 고전 발레의 대명사다. 하지만 1877년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초연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혹독했다. 음악비평가인 헤르만 라로슈는 “무대와 의상이 춤의 빈약함을 조금도 숨기지 못 한다”며 이같이 평했다. 안무는 볼쇼이 극장 발레 마스터 율리우스 라이징거가 맡았다. 처음 발레 음악에 도전했던 작곡가 표토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는 가혹한 평가에 크게 낙담해 한동안 발레 음악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런 ‘백조의 호수’가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차이콥스키 사후의 일. 189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극장(현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마스터 마리우스 프티파와 조력자이자 후배인 레브 이바노프의 안무로 재탄생했다. 특히 이바노프가 맡은 호숫가 백조 군무가 호평을 받았고, 오늘날 무대에 오르는 ‘백조의 호수’ 프로덕션 대부분의 기반이 됐다. 차이콥스키의 풍부한 음악적 상상력도 새로운 안무를 통해 재평가됐다.
‘백조의 호수’가 불멸의 명작이 된 배경에는 감동적 서사도 있다. 지그프리트 왕자와 오데트 공주의 엇갈리는 운명 속 비극적 사랑이 관객의 가슴을 후벼 판다. 차이콥스키의 다른 발레 작품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과 달리 ‘백조의 호수’는 문학 원전이 따로 있지는 않다. 민담과 전설을 바탕으로 볼쇼이 극장 내부에서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전하는 서사 역시 프티파와 이바노프의 재안무 버전을 통해 완성됐다.
유니버설발레단 '백조의 호수'. '백조의 호수'의 호숫가 백조 군무가 압도적인 발레블랑(백색 발레)이다.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고전 발레의 악, 로트바르트와 오딜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 로트바르트와 오딜. 국립발레단 제공
‘백조의 호수’의 고전적 서사는 선과 악의 이분법에 기반한다. 순백의 오데트와 왕자 지그프리트의 사랑은, 마법사 로트바르트와 흑조 오딜의 계략으로 위협받는다. 귀족으로 변장한 로트바르트는 오데트와 닮은 자신의 딸 오딜과 함께 왕궁 무도회를 찾는다. 오데트만 바라봤던 왕자는 32회전(푸에테) 고난도 기술로 유혹하는 오딜을 오데트로 착각해 사랑을 고백한다. 이는 ‘순수 대 기만’이라는 구도를 시각적으로 강화한다. 둘의 대비는 서사의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장치다. 오데트와 오딜은 한 명의 발레리나가 연기한다.
로트바르트는 단순한 악당이 아닌 작품의 긴장과 갈등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다. 자유와 사랑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고 넓게는 권력의 상징으로도 해석된다. 초연 당시 오데트의 적은 계모였다. 1895년 프티파·이바노프 판본에서 로트바르트로 바뀌었다. 악의 얼굴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감정적 인물에서 권위적 존재로 전환된 것이다. 로트바르트는 억압적 권력을 지닌 인물로 재탄생했다. 단순한 개인 간 갈등을 넘어서, 계급과 구조의 문제로 해석할 수 있다.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 국립발레단 제공
프티파와 이바노프의 안무를 바탕으로 하되, 각 발레단은 조금씩 다른 결말을 선택한다. 지그프리트와 오데트가 함께 로트바르트를 물리치기도 하고, 지그프리트가 죽고 오데트가 절규하는 비극으로 끝나기도 한다. 혹은 현실에서는 죽음을 택하지만, 내세에서 재회하는 판본도 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은 루돌프 누레예프의 해석으로 공연한다. 뉴욕시티발레단은 조지 발란신의 버전을 따른다.
한국에서는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이 서로 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국립발레단은 최근 타계한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재안무작을 공연해 왔다. 오데트와 지그프리트가 진정한 사랑으로 운명을 극복하는 해피엔딩이 특징이다. 반면 유니버설발레단은 프티파와 이바노프의 원작 4막을 2막 4장으로 압축해, 밀도 높은 서사를 선보인다. 결말은 보다 현실적인 감동을 위해 비극적으로 유지한다. 유니버설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는 다음 달 19일부터 27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외부 존재 아닌 내부의 적… 진화하는 빌런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LG아트센터 제공 ⓒJohan Persson
차이콥스키의 아름다운 음악 덕분에 ‘백조의 호수’는 현대적 감각으로 끊임없이 변주된다.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과의 투쟁으로도 해석되는 소재 때문이기도 하다. 오는 18일부터 29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되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그런 재해석의 대표적인 예다.
이 작품은 1995년 런던에서 초연됐고, 한국에서도 2003년 첫 내한부터 총 다섯 차례 무대에 올랐다. 고전 발레에서 빌런은 마법을 부리는 외부의 존재였다. 그러나 매튜 본의 해석에서 악은 훨씬 더 복잡한 얼굴로 등장한다. 이제 백조를 괴롭히는 건 마법사가 아니라 내면을 통제하려는 어머니, 욕망을 금기시하는 사회, 그리고 스스로를 가두게 하는 규범이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LG아트센터 제공 ⓒJohan Persson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근육질의 남성 백조를 등장시켜 먼저 시선을 끌었다. 사실 진짜 파격은 무대 뒤에 있다. 작품은 동화 같은 원작 대신 현대 영국 왕실을 배경으로 삼는다. 유약한 ‘왕자’와, 그가 갈망하는 자유와 힘의 상징인 ‘백조’ 사이의 관계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이 무대에서 악은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을 억제하고, 규범에 순응하라고 요구한다. 어머니와 왕실, 사회 구조는 모두 왕자를 억누르는 ‘정상’의 얼굴들이다. 그들은 왕자가 진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만든다. 매튜 본의 작품에서 빌런은 외부가 아니라 개인 내면과 사회 구조 속에 존재한다.
마법사는 물리쳤지만, 진짜 나를 찾지 못하게 하는 빌런은 여전히 무대에 남아 있다. 초연 후 150년이 지난 지금도 ‘백조의 호수’는 같은 질문을 던진다. 많은 관객이 오랜 시간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진화하는 ‘백조의 호수’를 계속 찾는 이유가 아닐까.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LG아트센터 제공 ⓒJohan Persson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LG아트센터 제공 ⓒJohan Persson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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