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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잇는 상처는 고정되지 않는다
트라우마의 전파, 문화와 돌봄의 영향 커
- 박해련 기자 (press3@koreatimes.net)
- Jul 11 2025 03:08 PM
최근 몇 년 사이 세대를 초월한 트라우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유전자가 가족의 과거 고통을 후손에게 전달하는지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해졌다.
트라우마가 유전자를 통해 고정된 방식으로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접근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해석이다. 트라우마의 영향은 유전자 그 자체보다는, 유전자가 환경에 따라 작동하는 방식, '표현형 가소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성과 더욱 밀접한 관련이 있다.
표현형 가소성이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생물이라도 주변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특성을 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DNA 자체를 바꾸지 않더라도 그 사용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후성유전학이 그 대표적인 예다. 후성유전학은 DNA에 부착되는 화학적 표식이 유전자의 발현 정도를 조절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 역시 환경에 대한 반응 중 하나일 뿐이며, 전체 생물학적 반응의 일면일 뿐이다.
인간 발달은 생물학적 요인만이 아니라 양육, 공동체, 스트레스, 안전, 소속감 같은 삶의 경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요소들은 상호작용하며 사람의 생리와 심리에 지속적 영향을 미치지만, 그 영향이 고정되거나 단선적이지는 않다. 트라우마가 세대 간에 어떤 식으로 전달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러한 요소들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살펴야 한다.
자연계에서 표현형 가소성은 흔하게 관찰된다. 꿀벌은 유전적으로 동일한 유충이라도 먹는 것에 따라 여왕벌이 되거나 일벌이 되며, 큰가시고기는 포식자에 노출될 경우 스트레스 반응과 체형이 바뀌어 포식자를 회피하기 쉬워진다. 인간 역시 불안정한 환경에서 성장할 경우 스트레스에 민감한 생리적 특성을 갖게 되며, 이는 특정 환경에서는 생존에 유리하지만 안정적인 사회에서는 불안과 만성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다. 이를 '환경 불일치'라고 부른다.
세대를 거듭하며 가소성은 더욱 복잡하게 작용한다.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한 세대의 식단이 자손과 손주의 건강, 생식능력, 수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 효과는 세대와 형질에 따라 달라 예측이 어려웠다. 이는 한 세대에 유리한 특징이 다음 세대에도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후성유전학은 스트레스, 영양, 돌봄 같은 환경 노출의 흔적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영구적인 상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히 생애 초기에는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환경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 유아기 스트레스에 따른 생물학적 영향도 이후 가족의 안정성과 사회적 지지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트라우마는 유전적 상처가 아니라 환경과 관계에 따라 세대 간에 변화하는 생물학적 반응이다. 언스플래쉬
트라우마가 유전자를 통해 자동적으로 전달된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협소하다. 실제로는 호르몬 변화, 면역 반응, 자궁 내 환경 등 다양한 생물학적 경로가 다음 세대의 뇌 발달과 스트레스 반응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기에 유전적 변이 또한 작용하며, 이 변이는 감정 조절이나 위협 민감성과 같은 성향을 형성하지만, 그 자체로 트라우마를 암호화하지는 않는다.
이 모든 생물학적·심리적 특성은 특정한 사회적·문화적 맥락 안에서 형성되고 강화되거나 완화된다. 뉴질랜드 아오테아로아에서는 토지, 언어, 혈통 등 마오리 정체성을 회복하는 공동체 활동이 식민지배에 따른 트라우마 치유에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후손들은 의식과 공동 서사를 통해 트라우마의 심리적 부담을 덜 수 있었다는 연구도 있다.
모든 트라우마가 집단적이거나 제도적인 것은 아니다. 양육방식이나 초기 인간관계에 기반한 개입이 다음 세대의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안전한 관계, 규칙적인 일상, 의미 있는 삶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줄이고 면역체계를 조절하며 만성 질환 위험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
이처럼 문화, 돌봄, 공동체와의 연결은 단순한 심리적 지지를 넘어 신체 생리에도 영향을 미치는 생물학적 개입이다. 이 요소들이 전 세대에서 축적된 스트레스의 영향을 줄일 수 있다면, 트라우마의 세대 간 전파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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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련 기자 (press3@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