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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재판의 쟁점은 '동의'보다 '동의한 상태'
가해자 피해자간 권력관계 있었나 살펴야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Aug 08 2025 03:41 PM
4건 혐의받은 가톨릭 주교 평안한 삶 마쳐
1990년대 휴버트 오코너(Hubert O’Connor) 가톨릭 주교는 원주민학교에서 자행된 성범죄로 기소된 캐나다 최초의 가톨릭 성직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현 연방총리 마크 카니의 부친으로 교육부 고위직에 있었던 로버트 카니는 사건을 조사하면서 학교측에 유리하고 피해자들에겐 불리한 보고서를 썼음이 최근 밝혀졌다.
원주민정의재단(IJF)의 원주민학교 기록보관소가 가진 법원 문서와 기록은 이 사건이 결국 나이 어린 원주민 학생과 교직원이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의 성적 접근에 어떻게 ‘동의’했는지를 둘러싼 법적 판단 문제였다. 재판은 기각됐고 주교는 감방 생활을 하루도 맛보지 않고 세상을 하직했다.
1935년 당시의 세인트조셉 원주민학교(St. Joseph's Residential School) 여학생들. 진실화해센터 자료사진
오코너 주교는 그러나 1960년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 있는 세인트조셉 인디언학교에서 비서였던 10대 여직원을 성폭행한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BC주 대법원 판사였던 월리 오팔(Wally Oppal)은 1996년 판결문에서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휴버트 오코너 주교
즉 가해자의 권위적 지위가 사건을 일으켰다는 해석이었다. 그러나 상급법원의 항소심 판사들은 “권위를 통한 동의는 진정한 동의가 아니다”는 오팔 판사의 의견에 반대, 유죄 판결을 무죄로 결정했다.
이 사건에 대해 최근 처음으로 공개 언급한 오팔 판사는 오코너 재판의 중심 쟁점들은 그후 수십 년간 성폭력 재판에서 반복됐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앨버타주에 있었던 원주민 기숙학교. 진실화해센터 자료사진
혐의에 대해 주교는 성행위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지만 “상호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온타리오주 런던에서 마감된 하키선수 6명의 집단 성폭행 혐의 무죄 판결 사건과 같았다. 사건 당시 10대였던 선수들은 한 여인을 호텔방에 불러들이고 그를 집단 성폭행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피고인들은 모두 무죄로 낙착됐다.
오팔 판사는 BC 항소법원 판사, 주 법무장관, 로버트 픽턴 사건(수십 명의 성매매 여성들을 살해, 최근 교도소에서 피살) 조사위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오코너처럼 피해자와 권력 관계가 있는 경우에는 권력 불균형이 동의에 영향을 미쳤는가가 핵심이다. 피해자가 동의했더라도 그 동의는 부적절한 방법으로 얻었을 수 있다”라고 판사는 말했다. 성직자, 교사 등 권위를 가진 인물과 권위가 없는 피해자가 연루된 사건에서 이런 질문이 자주 제기된다는 것.
“피해자가 실제로 동의했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 동의는 권위자에 의해 강요된 것일 수 있다.”
이같은 판결에 대해 UBC대학교의 법학과 교수 이사벨 그랜트(Isabel Grant)도 같은 의견이다. “권력자의 영향으로 형성된 동의는 동의가 아니다.”
연방정부는 1985년 형법을 개정, 다음과 같은 문구를 명시했다.
“피고인이 신뢰, 권력, 권위의 지위를 남용, 고소인을 성적 행위로 유도한 경우, 피해자의 동의는 무효다.”
현재 캐나다서는 변호사가 피해자의 성적(sexual) 이력을 재판정에서 물을 수 없다. 전에는 변호사가 증언대에 선 피해자의 과거 난잡했던 행위를 증거로 내세워 가해자의 무죄를 유도했다.
한국에선 6.25 전쟁 직후 여러 여인을 겁탈한 박인수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해 법원은 피해자들의 과거를 판단, “국가는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유명 문구를 유행시켰다.
이같은 법조항은 피해자들의 신고를 꺼리게 만들었고 국가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발을 권장하고 보호해야 했다.
오코너 주교는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윌리엄스 레이크에 있는 세인트조셉학교(일명 캐리부 주택학교)의 교장이었다.
1991년 그는 과거 교장으로 재직할 때 학생들과 원주민 여성들을 상대로 한 성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캐나다에서 원주민학교 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세 번째 가톨릭 성직자였다. 첫 번째는 17건의 성폭행을 인정한 해롤드 맥킨티(Harold McIntee) 신부, 두 번째는 수십 건의 성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글렌 도티(Glenn Doughty) 가톨릭 수도사였다.
주교를 혐의자로 세운 첫 재판은 1992년 시작되었지만 검찰의 ‘자료 비공개’로 중단되었다가 1996년 대법원 명령에 따라 새 재판이 열렸다. 그에 대한 혐의는 성폭행 2건, 강제추행 2건이었고 피해자는 모두 학생이거나 이후 직원이 된 여성들이었다.
오코너는 법정에서 두 명의 피해자와는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나머지 두 명의 고소인에 대해서는 아예 “그런 일조차 없었다”고 반박했다.
피해자들은 법정에서 그가 “절대적 권위자였다”고 증언했다.
그 학교 학생이었고 나중에 비서로 채용된 19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에 대해서 오코너는 유죄를 선고 받았다. 그녀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다며 주교가 방으로 불러 침대에 앉히고 옷을 벗으라고 했는데 그가 무서웠고 또 직장을 잃을까봐 거부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이후 10차례 관계를 가진 끝에 그녀는 임신했다.
오팔 판사는 “그녀가 저항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6살 때부터 학교에 다녔고, 가톨릭 신자로서 사제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고 배웠다. 오코너 주교는 사제 겸 그녀의 고용주였다”고 설명했다.
법정은 오코너에게 강제추행 1건에 대해서는 유죄를, 다른 2건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다른 성폭행 피해자도 임신했으나 오코너는 입양 서류에 아버지를 ‘회계사’라고 허위 기재했다. 그러나 이 사건 피해자의 증언은 신빙성 부족으로 기각됐다.
1998년 오코너는 유죄 판결에 항소했고 항소법원은 “동의 여부에 관한 하급심의 오팔 판사 판단이 불충분했다”며 새 재판을 명령했다. 당시 형법은 ‘가해자가 사건 때 권위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피해자가 동의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사정이야 어쨌든 피해자가 동의했으면 가해자는 무죄라는 것. 항소심은 또한 오코너가 사건 발생 때 그 지역에 없었다는 주장을 인정했다.
원주민 공동체의 정의: “법정이 아닌 화해의 장”
원주민 공동체는 ‘동의’에 대해 법원의 판단과 달랐다.
피해자 마릴린 벨로는 “법정에 서는 경험이 다시 피해자가 된 기분”이라고 언론에 불평했다. 피해자들은 결국 오코너와 마주 앉아 그가 끼친 피해를 말하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선택했다. 이에 따라 1998년 **7시간의 치유 작업(healing circle)**이 시작되었다. 벨로는 “오코너의 사과가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죄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시간은 치유의 과정으로 꼭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 후 재판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오코너는 법정에서 사과했고 검찰은 다른 성폭행 혐의 기소를 취하했다.
명예가 유지되다
오코너는 학교를 떠나 프린스 조지 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나 사정당국에 의해 형사적으로 기소된 후 주교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수많은 신빙성 있는 고발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직 주교(비샵 이머리투스Bishop Emeritus)”라는 호칭을 갖고 2007년 사망할 때까지 명예로운 지위를 유지했다.
그는 브리티시컬럼비아 미션에 있는 수도회 공동묘지에 매장됐다.
“이런 혐의가 있었는데도 왜 주교 직함을 유지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당시 밴쿠버 대주교였던 아담 엑스너(Adam Exner)는 이렇게 답했다.
“서품(신부직을 받는 의식)은 세례와 같습니다. 한 번 세례를 받으면 취소할 수 없듯이, 한 번 서품을 받으면 취소할 수 없습니다.” 교회 법이 사회 법보다 우선한다는 의미다.
이런 역사들을 통해 현재의 엄격한 법이 재정됐다. 그러나 이번 하키선수들의 재판은 세계적 관심을 끌었지만 무죄로 낙착됐고 캐나다 사회는 법원판결을 수긍, 문제삼지 않았다.
박인수 사건이란?
1954년 4월부터 1955년 6월까지 해군 헌병 대위 계급을 사칭한 박인수가 여대생을 비롯해 70여명의 여인을 간음한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박인수는 6·25 한국전쟁때 대학을 중퇴하고 해병대에서 헌병 부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애인에게 배반을 당하자 여성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다. 박은 주로 해군 장교 구락부, 국일관, 낙원장 등을 무대로 여인들을 유혹,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70여 명의 여성과 관계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군에서 익힌 사교춤으로 여성들을 유혹했다. 검사는 그의 행동을 '혼인을 빙자한 간음'이라고 주장했으나, 그는 '나는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고, 여성들이 스스로 몸을 제공했다'고 반박했다. 이에 1심 법정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고 하면서 혼인빙자간음죄(수년 전 형법에서 폐기함)에 대해서는 무죄를, 공무원 사칭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하여 2만 환의 벌금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2심, 3심에서는 1년간의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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