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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블러 들고, 우산 고쳐쓰는 주인공이 낯설지 않길...
일회용 빠진 드라마 반갑고도 씁쓸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Oct 05 2025 08:38 PM
탄소 저감 실천 자연스러운 일상을
최근 변영주 감독의 드라마 ‘사마귀’ 를 보다가 낯선 장면을 마주했다. 형사 둘이 경찰서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며 범죄 관련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손에 들린 게 사건 자료나 담배가 아니라 텀블러가 아닌가. 두 명의 형사가 각자 두어 개의 텀블러를 들고 와 동료들의 요청대로 주문하고, 순서대로 나오는 텀블러에 담긴음료를 받아 뚜껑을 닫고, 다시 양손에 들고 가는 장면을 카메라는 중요한 의식이라도 되는 양 꽤 길게 따라갔다.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에서 솔(김혜윤)과 선재(변우석). tvN 제공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7, 8년 전 텀블러와 일회용 컵의 탄소발자국을 계산해 쓴 기사에 대한 문의가 아직도 메일함의 절반을 차지하는 내게 그 장면은 유독 슬로모션으로 지나가는 듯했다.
반가웠고, 그다음엔 감독이 의도한 것일지 궁금해졌다. 평소 각종 사회문제에 목소리 내던 그라면 그럴 것도 같았다. 지원군을 얻은 듯한 든든함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 반가움은 씁쓸함으로 바뀌었다. 드라마는 최대한 일상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게 중요할 텐데, 텀블러가 보이는 장면이 이렇게 나 낯설게 느껴진다니. 텀블러는 아직 일상이 아닌 것이다.
십수 년 전부터 에코백과 함께 ‘친환경 기념품’ 쌍두마차였던 텀블러가 무턱대고 기념품으로 뿌려지는 일은 다행히 주춤해졌다. 대신 이미 있는 것부터 잘 쓰자는 분위기 속에 사용하지 않는 텀블러는 나누고, 공공기관과 프랜차이즈 커피 매장엔 텀블러 세척기가 놓였다. 그러나 생수 판매량은 줄지 않고,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여전히 일회용 컵이 더 많이 들려있다.
드라마에 등장한 텀블러의 생경함과 다르게, 요즘 새롭게 일상이 된 장면이 있다면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남녀노소 상관없이 양산을 쓰고 다니는 모습이다. 양산은 체감온도를 10도나 낮춰주는 효과가 있어 꼭 필요한 ‘기후위기템’이다. 올해 국내 유명 패션 플랫폼에선 남성 양산 검색 건수가 전년 동기 대비 10배 증가했고, 기상청은 전국 시·도 교육청과 함께 ‘하굣길 양산 쓰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폭염과 폭우에 모두 대비할 수 있는 우양산이 텀블러로부터 기념품의 왕좌의 자리를 이어받은 듯하다. 올여름 우리 집만 해도 식구마다 받아 온 우양산이 세 개째라 최근엔 우양산 수령 제한조치까지 내렸다. 우(양)산은 꼭 필요한 물건이지만 한두 개 작은 부품만 고장 나도 쓸 수 없다. 고치면 쓸 수 있는우산들이 부품과 기술자가 없어 한국에서만 한 해 약 4,000만 개가 버려진다는 것도 이미 알 만한 사람은 안다.

2023년 6월 28일 서울 정동길에서 열린 텀블러 데이 행사에서 텀블러를 지참한 한 시민이 무료로 음료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지금 같은 추세라면 텀블러, 에코백에 이어 집마다 우양산이 쌓여 요일별로 다른 우양산을 들고 다녀도 될 판이다.
전국 제로웨이스트 숍에선 어렵게 기술자를 섭외해 고장 난 우산을 고쳐주고, 작은 고장은 스스로 해결하게 셀프 수리 워크숍도 열며, 모듈형 부품 설계와 버려진 우산에서 나온 재생 소재로 자원순환성을 높인 우산 제품도 등장했다. 그러나 우(양)산 수리가 일상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드라마 주인공이 고장 난 우산을 고쳐 쓰는 장면을 생소함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시청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기후행동은 억지와 불가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범죄자를 쫓다가 갈증을 느낀 형사가 갑자기 텀블러를 꺼내 물을 마시고, 비 오는 날 등굣길 아이들의 손마다 들린 게 찢어진 우산이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시인과 촌장의 노래 ‘풍경’의 가사처럼 장 볼 때는 장바구니를 들고, 수돗물을 믿고 마시고, 새로 사는 것보다 고쳐 쓰는 게 값도 싸고 당연했던 예전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이런 장면이 일상으로 채워지고 그 일상이 자연스럽게 비치는 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1인분의 기후행동’ 이다.
이윤희 기후변화행동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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