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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시선에 갇혀 ‘가면’ 쓰고 사는 우리
트루먼의 삶과 얼마나 다를까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Oct 01 2025 10:39 AM
30년간 TV 세트장에서 살던 트루먼 ‘거짓 증거’ 연이어 목격하면서 대혼란 엄마 잃은 아이와 같은 불안 느꼈을 것 트루먼은 이성 되찾고 ‘탈출’을 결심 유일하게 각본에 없던 첫사랑 실비아 그녀가 알려준 ‘진짜 나’의 힌트 덕분 SNS ‘좋아요’ 등 우리를 둘러싼 시선 인정·관심에 집착하면 공허함에 지쳐 내 감정·욕구에 충실할 때 ‘쇼’는 끝나
“굿 모닝! 못 볼 수도 있으니 미리 인사하죠.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이트!”

영화 '트루먼 쇼'에서 주인공 트루먼이 출근 전 이웃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모습. 파라마운트 픽처스 제공
매일 아침 유쾌한 인사를 건네며 현관문을 나서는 한 남자가 있다. 보험회사 직원인 트루먼 버뱅크. 그의 삶은 겉보기에 더없이 평화롭고 이상적이다. 아름다운 아내와 좋은 직장, 친절한 이웃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트루먼 자신이 알지 못하는 거대한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 그의 인생 전체가 탄생의 순간부터 ‘트루먼 쇼’라는 이름으로, 30년째 전 세계 수십억 명에게 생중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사는 마을 ‘시헤이븐’은 우주에서도 보일 만큼 거대한 돔 세트장이고, 가족과 친구는 모두 고용된 배우다. 트루먼이 겪는 모든 사건은 시청률을 위해 철저히 기획된 ‘콘텐츠’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트루먼 쇼’는 이처럼 한 개인의 삶이 완벽하게 통제되고 상품처럼 소비되는 충격적인 설정을 통해, 관객에게 삶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만약 나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 연출된 것이라면? 나의 의지와 선택이 사실은 거대한 각본의 일부였다면? 1998년에 개봉해 곧 30주년을 맞는 영화지만, 이 질문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다매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묵직한 울림을 준다. 이 글에서는 주인공 트루먼의 심리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진짜 나’로 살고 싶다는 인간의 근원적 욕구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진짜 나’를 찾아 떠나는 용기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트루먼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출근 전 거울을 보며 혼잣말 하는 모습까지 TV를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되고 있다. 파라마운트 픽처스 제공
30년간 완벽하게 유지되는 듯 보였던 트루먼의 세상에 하나둘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어느 날 하늘에서 조명이 떨어지고, 운전 중 라디오에서는 그의 동선을 정확히 묘사하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노숙자로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끌려가고, 옆 건물 엘리베이터 문을 열자 연기자들의 대기 공간이 펼쳐진다. 심지어 결혼사진 속 아내는 거짓을 의미하는 동작인 손가락을 겹쳐 X 자를 만들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상한 일’로 치부했지만, 그의 삶이 거짓이라는 증거들이 연이어 나타나면서 트루먼은 혼란에 빠진다. 내가 믿어온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충격은 프로이트가 말한 ‘대상 상실의 불안(Anxiety over Loss of the Object)’의 재현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생애 초기에 겪는 가장 원초적인 불안으로, 생존에 필수적인 양육자가 사라져 자신의 존재마저 소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말한다. 성인에게 이 불안은 배우자의 죽음, 갑작스러운 실직, 혹은 굳게 믿어온 신념 체계의 붕괴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지탱하던 심리적 뼈대가 무너질 때 재현되곤 한다. 마치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나’라는 존재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무력한 존재임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대상 상실의 불안에 놓인 사람들은 대개 ‘퇴행(Regression)’이라는 방어 방식을 택한다. 고통을 줄이고자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불안의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며 분노하거나, 그 일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부정해 버리기도 한다. 심한 경우 망상과 환각 같은 정신병적 증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트루먼은 그러지 않았다. 일시적인 혼란 속에서 돌발 행동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내 이성을 되찾고 쇼의 세상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대학 시절 열렬히 사랑했던 첫사랑 실비아. 파라마운트 픽처스 제공
트루먼의 자아는 어떻게 붕괴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를 붙들어 준 것은 첫사랑 ‘실비아’로 상징되는 ‘진짜 자기(True Self)’를 되찾고 싶다는 간절함이었다. ‘진짜 자기’는 영국의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캇이 고안한 개념으로, 개인의 자발적이고 진실한 감정과 욕구에서 비롯된 존재의 핵심을 뜻한다. 반면 ‘거짓 자기(False Self)’는 외부 환경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방어적인 가면이다. 트루먼은 제작진에 의해 욕구와 의지가 반복적으로 좌절되면서, 점차 자신의 진짜 감정을 숨기고 상황에 순응하는 거짓 자기의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거짓 자기가 삶을 잠식하면, 타인의 인정은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내면은 공허함과 무의미함으로 채워진다. 어떤 성공을 거두어도 ‘진정한 내 것’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삶이 가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시헤이븐에서의 30년이 바로 완벽하게 구축된 ‘거짓 자기’의 삶이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 우연히 만난 실비아는 그의 통제된 세상에서 유일하게 각본에 없던,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경험하게 해준 존재였다. 짧지만 강렬했던 만남은 트루먼의 내면에 조작된 것이 아닌 ‘진짜 감정’이 존재한다는, 희미하지만 강력한 증거로 남았다. 따라서 피지로 가겠다는 그의 꿈은 단순히 한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것을 넘어, 자신의 ‘진짜 감정’을 되찾고 ‘진짜 자기’로서 살고 싶다는 근원적 열망으로 보아야 한다. 이 간절함이 그의 자아가 붕괴되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심리적 닻(anchor) 역할을 하며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이 되어 준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 나르시시스트 창조주를 넘어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는 TV쇼를 기획하고 연출한 책임 프로듀서 크리스토프. 파라마운트 픽처스 제공
반대편에는 트루먼 쇼의 ‘보이지 않는 손’인 연출가 크리스토프가 있다. 그는 세상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는, 전능감(Omnipotence)에 사로잡힌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바깥 세상은 역겹고 거짓투성이지만, 내가 만든 시헤이븐은 천국”이라 말하며 스스로를 트루먼의 구원자라 칭한다. 하지만 트루먼을 아끼는 듯한 말과 달리, 그의 내면 어디에서도 트루먼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다. 트루먼은 그저 그의 완벽한 세계를 증명하고 시청자들의 찬사를 끌어내는 자기 대상(Self-object), 즉 자신의 위대함을 비춰주는 거울일 뿐이다. 트루먼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의 탈출 시도를 자신의 완벽함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분노하는 모습은, 타인을 욕구 충족의 도구로만 여기는 착취적인 면모를 명확히 보여준다. 시청률을 위해 트루먼에게 아버지를 잃는 트라우마를 심고, 그로 인해 생긴 물 공포증을 이용해 시헤이븐을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이 단적인 예다.
크리스토프의 방해에도 트루먼은 결국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요트를 몰아 바다로 나아간다. 마침내 세트장의 끝, 하늘 그림이 그려진 벽에 도달해 비상구를 발견한다. 그 순간 하늘에서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모든 진실을 알려주며, 바깥세상은 위험하지만 이곳에 머무르면 안전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마지막까지 회유한다. ‘진짜 자기’를 향한 열망과 ‘거짓 자기’가 주는 안락함 사이에서, 트루먼은 크리스토프의 유혹을 등지고 세트장 밖 진실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던지는 그의 마지막 인사는 이 영화의 백미다. “굿 모닝! 못 볼 수도 있으니 미리 인사하죠.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이트!” 30년간 그의 ‘거짓 자기’를 상징했던 이 대사를, 트루먼은 마지막 순간 자신의 것으로 가져와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은 지난 인생과의 작별인 동시에, 크리스토프를 향한 가장 통쾌한 반격이다. 쇼의 상징과도 같은 대사를 통해 “아무리 사실 같아도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만든 쇼였고, 이제 나는 나의 진짜 세상으로 돌아간다”고 선언하며 그의 전능감을 산산조각 내버린 것이다.
당신은 ‘트루먼 쇼’ 주인공으로 남을 것인가?

영화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에서 세트장 끝에 다다른 트루먼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 전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파라마운트 픽처스 제공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는 이런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과연 우리의 삶은 트루먼의 삶과 얼마나 다를까? 24시간 일상을 생중계하는 카메라는 없지만, SNS의 ‘좋아요’ 수, 선망 어린 댓글, 나아가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 기준이라는 보이지 않는 시선이 우리를 촘촘히 둘러싸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진짜 나’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 더 행복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편집하고 연출한다. 진짜 자기를 내어주고 그 빈자리를 타인의 인정과 관심이라는 ‘거짓 자기’로 채워가는 우리는, 이미 ‘트루먼 쇼’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사회적 동물로서 어느 정도 ‘거짓 자기’의 가면을 쓰고 타인의 호의를 얻으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내면의 진짜 욕구가 아닌 거짓 자기의 요구에만 따르다 보면 영혼은 공허함에 지쳐가고,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길을 잃게 된다. 진료실에서 많은 분들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혹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거짓 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조금 부족하고 서툴더라도 ‘진짜 나’의 모습 그대로 세트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용기다. 지금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이 나를 살아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지 차분히 고민해보길 바란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거대한 돔 세트장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나의 감정과 욕구를 먼저 들여다볼 때, 비로소 우리는 각자의 ‘트루먼 쇼’를 끝내고 진짜 인생의 무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동훈 연세온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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