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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획기사

“한반도에 육군을”

대통령 깨워 美 파병 이끈 숨은 공로자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Oct 13 2025 11:03 PM

로턴 콜린스 - 美 ‘6·25 간접 개입’ 뒤집은 육참총장 6개월간 네 차례 한국 찾아 진두지휘 세계 최강 육군의 최고경영자 명성


누가 대통령의 단잠을 깨울 것인가?

새벽 네 시. 펜타곤에서 밤을 새운 미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대통령 재가가 필요한 상황인데,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자고 있을 시간이다. 대통령을 깨워야 할까, 아니면 몇 시간 기다렸다가 아침에 보고할 것인가.

여러 생각이 오갔지만, 콜린스는 이런저런 사정을 따질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어, 펜타곤 다른 사무실에서 대기하던 육군장관 프랭크 페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께 바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트루먼이 머물던 블레어하우스에 전화벨이 울린 시간은 오전 4시 57분이다. 트루먼은 그날 새벽 자기가 군통수권자로서 결정할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에 일찍부터 깨 있었다. 전화를 받은 트루먼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요청대로, 한반도에 육군 1개 연대전투단을 즉시 투입합시다.”
 


순식간에 결정된 지상군 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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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18대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 대장. 미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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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턴 콜린스 이력. 송정근 기자

 

이때가 1950년 6월 30일 오전 5시(미 동부시간)다. 미 지상군의 한반도 투입은 이렇게 새벽녘에 급박하게 결정됐다. 6·25 전쟁 초반 미국의 가장 결단력 있는 조치였던 ‘육군 파병 승인’ 은 불과 네 시간 만에 최단 경로(극동사령관→ 육군참모총장→육군장관→대통령)를 통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당시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다. 콜린스는 워싱턴의 트루먼과 극동의 맥아더를 이어주는 고리였다. 맥아더는 6월 29일 수원과 영등포를 방문해 국군의 방어 상황을 점검한 후, 한국만의 힘으로 이 전쟁을 절대 이길 수 없음을 간파했다. 맥아더는 당일 도쿄에 복귀해 “한국군이 반격 능력을 상실한 채 무너지고 있으며 현재로서 유일한 방안은 한반도에 미 지상군 부대를 보내는 것”이라는 전문을 본국에 보냈다. 이것은 해공군 작전만으로 한국전쟁에 간접 개입한다는 기존 미 정부 방침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지상군을 투입한다는 것은 ‘미국의 전쟁’으로 사태를 격상한다는 의미다. 이런 결정을 하려면 대통령이 국무·국방부와 긴밀한 논의를 거치고, 의회 지도부의 공감을 얻는 긴 사전정지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전황은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었다. 정상적 논의를 거쳐 몇 주 후 미 지상군 투입을 결정해 본들, 그때는 한반도에 지킬 땅이 남아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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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암울한 보고가 펜타곤에 접수된 시간은 6월 30일 오전 1시(현지시간). 기다릴지, 지금 즉시 행동을 개시할지를 콜린스가 결정해야 했다. 콜린스는 즉시 참모들을 소집하고 두 시간 후 극동사령부와 원격회의를 열어 직접 맥아더의 의견을 들었다. 심각한 상황을 보고받은 콜린스는 맥아더에게 “30분 안에 대통령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서두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 육군장관을 통해 트루먼을 설득했다. 콜린스의 신속 조치와 트루먼의 빠른 결단 덕분에 바로 다음 날인 7월 1일 미 육군 첫 파병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도착했다.

전쟁사를 보면 긴박한 새벽 상황에 최고사령관 혹은 군 수뇌부를 감히 깨우지 못해 골든타임을 날려버린 사례가 종종 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서부전선을 방어하던 독일군은 히틀러(자기 명령 없이는 주요 부대 이동을 금지했다)의 아침잠 때문에 기갑부대 투입 시기를 놓쳤다. 6·25 당일 아침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은 국방장관 신성모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연락을 받지 않아 그 긴박한 때에 직접 장관 관사까지 지프를 타고 달려갔다.

그에 비해 지상군 투입 결정 당시 미국 정부의 대응은 흠잡을 곳 없었다. 맥아더는 최전방을 직접 방문해 전투 상황을 눈으로 확인한 뒤 본국에 가감 없는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했다. 육군참모총장은 현지 사령관 보고에서 긴급함을 감지하고 새벽에 대통령을 깨워 직보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잠을 줄이며 기다리던 대통령은 현지 사령관과 육군 수뇌부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신속하게 군사행동의 길을 열어줬다.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로턴 콜린스는 6·25 전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49년 8월부터 1953년 8월까지 4년간 육군참모총장이었는데, 한국전쟁 내내 미 육군을 책임진 최선임 장교였다. 6·25 당시 △미 지상군 투입·증원·교대 △장교 인사이동 △유엔군 군수 보급 △한국군 장비 지원과 교육 등이 모두 콜린스의 책임 아래 이뤄졌다. 유엔군의 ‘물량전’을 설계·가동한 인물이 바로 콜린스였다.

콜린스는 야전과 행정 양쪽에서 모두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은 보기 드문 군인이다. 2차 대전 발발 후 콜린스는 먼저 태평양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42년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전투에서 25사단장으로서 군사적 수완을 발휘해 ‘라이트닝 조(Lightning Joe)’라는 별명을 얻었다. 과단성 있고 신속한 결정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의미다. 이후 유럽으로 이동해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미군 선봉부대인 7군단을 이끌고 유타 해변에 상륙했고, 곧이어 항구도시 셰르부르 공략을 성공시켜 연합군 보급항을 확보하는 공을 세웠다. 전후에는 워싱턴으로 불려가 육군참모차장을 거쳐 1949년 미 육군 최고 자리까지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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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한반도 개입이 본격화한 1950년 12월 16일, 한국전쟁에 본격 참전하기 위해 국가비상사태 선언에 서명하고 있는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 미 국립문서관리청

 


6개월간 네 차례 한국 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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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참모총장이라면 펜타곤 사무실에 들어앉아 세계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통해 현장 사정을 파악하며 행정이나 대통령 보좌에만 몰두했을 것 같지만, 6.25 전쟁 당시 콜린스는 특별하게 한국을 많이 찾았다.

물리적으로 한국 시찰은 간단치 않은 여정이었다. 당시 미 동부에서 한국까지 오려면 미 서부→하와이(또는 알류산 열도)→도쿄 등 서너 군데 중간 기착지를 거쳐야 했다. 워싱턴에서 한국까지 편도 이동 시간만 꼬박 이틀 정도가 소요됐다. 그럼에도 콜린스는 전쟁 고비마다 워싱턴에서 한국으로 날아와 최전방을 직접 확인하며, 트루먼 대통령의 눈과 귀 노릇을 했다. 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대통령과 합참에 전달해 필요한 조치를 이끌어냈다.

특히 1950년 7월 중순부터 이듬해 1월 중순까지 6개월간, 그는 네 차례 한국을 찾았는데 모두 전쟁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확확 쏠리는 급박한 시기였다. 첫 방한은 1950년 7월 13일이다. 국군은 물론이고 새로 투입된 미군마저도 속절없이 남쪽으로 밀리는 중이었다. 미국이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을지, 한반도를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닌지, 방어가 가능하다면 전세를 뒤집기 위해 얼마만큼의 지상군 병력이 필요할지를 신속하게 결정해야 했다. 그걸 직접 현장에서 판단하기 위해 참모총장 콜린스가 극동으로 급파됐다.

원래 콜린스는 도쿄 극동사령부만 방문해 맥아더(유엔군사령관)와 월튼 워커(8군사령관)의 보고만 받고 워싱턴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계획을 바꿔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때 콜린스가 이용했던 여객기 DC-3의 항속속도는 시속 300㎞를 겨우 넘었다. 그래서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대구(8군사령부) K-2비행장까지 편도 6시간이 걸렸다. 힘들게 한국에 도착한 콜린스는 대구에서 8군 소속 지휘관과 참모들로부터 현장 보고를 받았다. 한국에 머문 기간은 한 시간에 불과했지만, 미 육군 최고위 장성이 최전방까지 날아와 관심을 표시했다는 것은 미군과 국군에게 매우 긍정적 신호를 줬다. 미국으로 돌아간 콜린스는 트루먼에게 “즉시 한반도에 병력을 증원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트루먼은 이를 받아들였다. 1기병사단(7월 18일), 2보병사단(7월 31일), 1해병사단(7월 31일) 등 미 정예사단이 속속 한국에 도착했다.

 

screenshot 2025-10-09 at 3.07.45 pm.png1950년 7월 미 육군 파병 병력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24사단 21연대 1대대)가 부산에 도착해 이동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월튼 워커의 유일한 후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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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0월 강원 양구군 펀치볼에서 미군과 국군 수뇌부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로턴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8군사령관, 클로비스 바이어스 10군단장, 백선엽 국군 1군단장. 위키미디어 커먼즈

 

두 번째 방한은 한 달 후인 1950년 8월 22일이다. 이때 콜린스는 인천상륙작전 관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왔다가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는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었다. 콜린스는 현장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해, 미 육군 모든 사단(2·24·25·1기병)과 국군 1사단(다부동)을 찾아 최전방을 둘러봤다.

당시 콜린스가 결정해야 했던 또 다른 문제는 워커의 경질 여부였다. 맥아더는 워커의 능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8군사령관을 바꾸려 했고, 7월 한국을 순시한 매슈 리지웨이 중장(합참 작전부장)의 생각도 교체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워커를 직접 만난 콜린스는 워커의 투지와 예비대 운용 능력 등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워커의 지휘 아래 미군과 한국군이 낙동강 전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결국 워커는 콜린스의 기대에 부응해 한국을 지켜냈다.

세 번째 한국 방문은 중공군 개입 이후인 12월 4일이다. 중공군 2차 공세가 시작(11월 25일)되자 미군이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11월 28일)하고, 미 해병1사단이 장진호에서 포위(11월 27일)돼 전멸 위기에 몰려 있을 때다. 향후 방어전략을 논의하고 미군 부대의 사기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콜린스가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때도 콜린스는 “서울을 잠시 잃을 수 있겠지만, 후퇴해서 전열을 가다듬은 후 다시 반격할 수 있다”는 워커의 말을 믿고, 다시 워커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한다. 미 군부 내에 별다른 인맥이 없었고, 유럽 전선 출신이라는 이유로 맥아더 사령부에서 소외됐던 워커를 지지했던 유일한 군 수뇌부가 콜린스였다.

콜린스는 1951년 1월 15일 한국을 네 번째로 방문했다. 이때는 중공군 남하, 워커 사망, 흥남 철수, 1·4 후퇴 등 암울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며 미국이 진짜 한국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을 시점이다. 당시 한미 양국 군 수뇌부의 보고나 발언들을 보면, 낙동강 전투보다 이때의 전황이 더 절망적이었다. 미 합참은 한국에서의 병력 철수를 심각하게 검토 중이었고, 낙관주의자 맥아더마저 ‘철수’라는 표현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한 콜린스의 말 한마디에 미군 철군이 결정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콜린스는 한국에서 밝은 면을 먼저 봤다. 워커 후임 리지웨이가 1·4 후퇴 11일 만에 공격작전(1월 15일 울프하운드 작전)을 실시하는 것을 목격했고, 미8군과 국군 장병들의 사기를 직접 확인한뒤 충분히 전쟁을 계속할 만한 상태라고 확인했다. 그리고 한국 순시 직후 “8군의 상태는 괜찮고, 리지웨이의 지도력 아래에서 날마다 개선되고 있다”는 전문을 보냈다. 콜린스의 자신감넘치는 보고를 받은 미국 정부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계속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한국전쟁을 마무리한 콜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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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같은 해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콜린스가 힘을 쏟은 것은 한국군 증강 작업이다. 한국군 사단 확충 및 교육 강화 방안은 리지웨이 후임 8군사령관인 밴플리트가 주도했고, 육군참모총장 콜린스가 워싱턴에서 힘을 실어주는 구조였다. 1952년 7월 콜린스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밴플리트가 국군 사단 증강을 건의하자, 콜린스는 밴플리트의 구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후 콜린스는 국군 병력 증원 문제를 합참에 들고 가서 논쟁 끝에 관철시켰고, 결국 같은해 9월 미 합참은 한국 육군과 해병대를 46만명까지 증원하는 방안을 트루먼에게 건의했다. 트루먼이 이 계획을 승인하면서, 한국 정부는 미국 지원을 받아 병력 증강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콜린스는 한국 복무 경험이 없어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장군이다. 그러나 6·25 기간 내내 ‘세계 최강 육군의 최고경영자’로서 병력·무기·물자·인사 등을 매끄럽게 관리하며 미국의 거대한 국력이 한반도에 제대로 투사될 수 있도록 관리했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희망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다른 미군 장군들과 달랐다. 전쟁 초반 여러 차례 한국을 순시한 콜린스는 ‘미군과 국군이 한반도에서 잘 싸우고 있으며 이 전쟁에 승산이 있다’는 점을 미 대통령, 국방장관, 의회에 반복해서 전달했다. 2차대전 영웅 출신 육군참모총장이 최전선을 직접 시찰하는 수고를 감수하며 보고한 내용을 미 행정부와 의회가 쉽사리 거부하기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도 콜린스는 미국이 6·25에서 한국에 대한 지원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해 준 숨은 공로자 중 한 사람이다. 6·25 과정에서 큰 기여를 했으면서도 한국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장조명받지 못했던 미군 장군 중 하나가 바로 콜린스다.  

이영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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