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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대하여
수필이 있는 뜨락(9)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Oct 30 2025 09:01 AM
사람이 떠난 옛집에 문패만 남은 것처럼, 토론토 중서부,블랙크릭과 에그링턴 아래 있는 길에 이정표가 서 있다. '포토그라피 드라이브'
그 길은 산업단지로 이어지는데 전체가 코닥 캐나다 소유였다. 생산시설과 사무실, 복지시설 등 모두 18채의 큰 건물이 군집한 코닥 마을 같은 곳이었다. 온타리오 내의 사진학과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견학했던 곳이라고 한다. 한 때는 토론토에서 가장 큰 기업이었다고 한다. 100년이 넘도록 전 세계 사진 업계를 지배했던 코닥은 이제 영원히 사라지고, 길 이름만 흔적으로 남았다. 그 길을 지나노라면 빛 바랜 앨범을 보는 것처럼 아련한 느낌이 든다.

Adobe Stock
고등학생 때, 수년간 바라던 카메라를 드디어 손에 넣고서 들뜬 마음으로 밤새도록 만지작거렸었다. 셔터를 누를 때 들리는 정밀 기계의 금속성 '챠그락', 그 소리는 알 수 없는 매력의 세계로 나를 초대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셔터 소리가 들리면 배낭 메고 기차에 오르던 시절이 떠올라 살짝 나를 설레게 한다. 등산과 여행 갈 때마다 소중히 챙겨 다녀서 학창 시절의 기록 대부분을 그 카메라로 찍었다.
추억에 새겨진 것은 소리만이 아니다. 냄새도 있다. 석유 버너를 예열하고 밸브를 조금 열면 석유증기가 오르는데, 그 때 얼른 불을 붙여 버너를 작동시켰다. 그 석유 증기 냄새는 셔터 소리와 함께 나를 추억 속으로 시간 여행시키는 스위치다. 지금은 서울에서 강릉까지 고속열차로 2시간이 채 안 걸리지만, 80년대에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비둘기호 열차를 타면 산 넘고 물 건너 16시간을 꼬박 가야 했다. 차타고 가는 시간이 길어, 적게 잡아도 두 끼는 열차에서 먹었다. 객차 화장실 맞은 편에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구석에서 승무원의 눈을 피해 덜컹거리며 버너와 코펠로 밥을 지었다. 기차에서 함께 밥을 짓던 친구가 지금은 디트로이트에 살아 가끔 만난다.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 객기 어리기도 했던 시절을 함께 유쾌하게 떠올린다.
포토그라피 드라이브를 지나면 구형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들리고, 석유 증기가 하얗게 오르며 냄새를 풍긴다. 앨범이 열리고 나의 오래된 추억이 피어난다. 결혼 전에 아내와 연애할 때 함께 북한산에 오르곤 했는데, 산길에서 끌어주고 산장에서 밥을 지어주던 내가 좋았다고 한다. 그리운 시절의 기억이 꼬리를 물고 떠올라 헤르만 헤세의 소설처럼 '청춘은 아름다워라'라고 느껴진다. 그러나 불안과 고민의 장면도 있다. 몸이 아파서 여러 달 학업을 중단했던 때가 있었다. 마주한 현실이 답답하기만 해서 혼자 교외선 열차를 타고 달리는 차창을 바라보았다. '이런 걸 질풍노도라고 하나?' 생각하며 내 안의 혼란스러움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소년은 이제 머리가 새고 책 읽을 때 돋보기를 찾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가끔 청년 시절의 느낌으로 가득 찰 때가 있다. 몇 해전에 제5공화국의 독재자가 죽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 소식은 포토그라피 드라이브를 지날 때처럼, 갑자기 나를 대학 시절로 데려갔다. 군사독재 시절, 최루탄을 뒤집어쓰면서도 구호를 외치고 행진했던 20대가 떠올랐다. 광주에서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죽은 이듬해에 5공화국이 출범했다. 아무리 간접 선거라지만 그 때 광주 선거인단 전원이 그 독재자를 찍었다. 아니 찍게 만들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이였던 나는, 비릿한 느낌에 처음으로 이민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그는 사과도 없이 앨범 속으로 들어간다. 사죄할 기회도 영원히 잃어버린 채로.
코닥은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으로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디지털 카메라를 처음 만든 기업은 코닥이다. 기억과 추억 속에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부끄러운 일, 불행한 일도 함께 섞여 페이지가 넘어간다. 예쁜 나도 있지만 미운 나도 있다. 시간은 위대하게도 많은 것을 숙성시켜 힘들었던 일을 차분히 볼 수 있게 한다. 중년의 나이에 소년기와 청년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듯이, 노년이 되면 이 시절을 그리워하겠지. 지금의 내가 미래에 그리워할 모습이라 생각하니 세상을 더 재미있게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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