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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단상

김용출(문협회원)


Updated -- Jan 28 2026 05:18 PM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Dec 31 2025 04:15 PM

수필이 있는 뜨락(18)


다 벗어던진 나무의 진실, 나목은 생명의 속살은 간직한 채 화려한 외장은 지웠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은 더 이상 떨어뜨릴 낙엽이 없는 듯 그 소리마저 공허하다. 낙엽은 어느 사이 자취를 감추고 마지막 잔존마저 잊혀졌다. 나목에 어울리지 않게 추위를 피해 보려 중무장의 방한복으로 걷는 나의 겨울 거리는 을씨년스럽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하다. 모두 비우고 떠났는데 나는 아직도 비우지 못하고 삶의 끈을 붙잡고 있다니. 걸으면서 생각한다. 대화는 쉬 단절되고 이해와 용서는 멀리 있다. 마치 겨울 거리 만큼이나 인간의 일들은 겨울을 닮았다. 벽난로 옆에서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의 대화가 그립다. 이 도시의 겨울은 적막하다. 그래서 모놀로그다. 상대가 없으니 내가 나에게 말할 수밖에. 겨울 가뭄처럼 내가 나에게 던지는 대화마저도 단절의 아픔을 겪는다. 자중자애하라고 타이른다. 그 말에 잠시 서늘해졌던 가슴에 약간의 온기가 돈다. 모놀로그는 몰려오는 차가운 바람에 상념의 끈은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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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be Stock

 

다시 이어지는 상념, 이번에는 반대어가 떠오른다. 지성과 교양이라는 허울 좋은 위선을 벗어버리라고, 자기를 비운 저 나무처럼 진실해지라고, 자아의 죽음 없이 지성과 교양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나를 윽박지른다. 이성은 또 어떻고. 넌 얼마나 너의 이성을 믿고 기고만장했던가. 이성에 대한 과신 말이야.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지. 위선! 위선! 인간은 위선 덩어리야. 이성적 존재도 아니야. 인간은 모두가 얼마나 성격이 강하고 고집과 자존심이 강한지 알기나 해. 이성적 존재가 되기엔 너무 이기적이야. 그것이 인간이라고. 나는 계속 걸으면서 생각한다. 그런데도 한편 가슴 밑바닥에서는 인간에 대한 그리움의 끈이 거미줄처럼 매달려 올라온다. 동토에 얼어 죽지 않고 어디엔가 살아있을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것은 인간애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고, 절체절명의 생명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자연은 스스로 자양분을 섭취하고 생존의 법칙에 충실한 우주 질서의 집합체이다. 지구상의 80억 인구가 매일 떠받쳐 올려 태양이 뜨지 않는다. 태양은 정해진 우주의 질서에 따라 뜨고 진다. 그래서 우주라는 말cosmos는 곧 질서를 뜻하는 것이리. 기러기가 저 창공을, V자형을 하고 나는 것이 그곳을 지나가는 나라의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조물주가 정해 놓은 신비한 태초의 우주 질서에 순응할 뿐이다. 저들은 백 년 후에도 천 년 후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저 얼어붙은 땅속에 깊이 스며있는 온기는 이 겨울, 어디쯤 자리하고 있을까. 사랑은 대지를 품고 용천湧泉하려는 생명에의 환희를 꽃피우도록 기다려주는 한 줄기 빛, 사랑은 오래 참고. 아직도 봄을 노래하기엔 이른 계절이어도 사랑이 언 땅을 녹이는 철리哲理이기에 사람들은 여전히 봄을 기다리겠지.

나는 추위를 이기려 걷는 속도를 빨리한다. 마침, 그때 주인의 손에 잡혀 목줄이 매인 테리어가 나를 쏘아보면서 온다. 나는 개를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디펜스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어릴 적 개에게 물릴 뻔했던 두어 번의 경험이 있고 난 뒤로는 항상 그렇다. 그래서 나는 애완동물을 싫어한다. 개도 고양이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 어릴 적 살았던 시골집에는 항상 개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개는 개장국으로 변해 사람들의 보신 거리가 되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해서 개와는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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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be Stock

 

 

짖는 개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 사람을 무는 개는 소리 없이 다가와 갑자기 달려들어 문다. 그것은 무는 개의 습성이다. 사람도 그렇다. 겉으로 과열을 잘하는 사람은 속으로 구겨 넣지 않는다. 속으로 구겨 넣는 사람이 일을 저지른다. 그런 상념과 함께 저놈은 사냥개 계열이니 사나운 놈, 혹 나에게 갑자기 달려들지 모르지, 주의를 하면서 지나친다.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이다. 내 마음과 저 잿빛 하늘이 때로는 상호작용을 하는 것 같다. 하늘이 맑고 온화한 계절엔 마음마저 밝고 온화해짐을 느낀다. 지금은 찌푸린 하늘만큼이나 내 마음도 찌푸려져 있다. 하늘의 이치는 변함이 없지만 변하는 것은 간사한 내 마음이다. 이렇게 이 겨울을 용케 살아남는다 해도 새봄에는 무슨 소망이 있을까. 계절의 순환 속에 세상 만물은 낡고 쇠해지기를 거듭할 것이다. 엔트로피entropy가 증가한다. 엔트로피, 피로가 쌓인다는 뜻이다. 차가운 물 한 잔도 컵에 담아 두면 식어 주위의 온도와 같은 온도로 변한다. 나무도 심으면 일정 기간 자라다 서서히 고목이 된다. 오늘의 빈 가지의 저 나목들도 나이테만큼 늙어가고 있을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 이치다. 어디서 왔을까. 까마귀 한 마리가 나무 위에 앉았다. 잠시 내 시선은 그리로 향했을 뿐 그것뿐이다. 나는 빨라졌던 걸음을 늦추면서 천천히 오늘의 코스를 돌아 집으로 향한다. 누군가를 향해서 출발했던 내 상념은 결국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나는 나의 모습을 발가벗겨진 나무와 비교해 본다. 내 모습의 전부가 저 나목처럼 될 때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진실, 그것 하나뿐이지 않을까.

 

문인협회-김용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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