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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시간’

황현수의 들은 풍월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an 08 2026 11:24 AM


지난해 12월 31일, 미국 뉴저지에 사는 친구가 연말 인사를 보내왔다. “2009년 달력이 아까워서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2026년과 날짜, 요일이 같아 다시 걸어 놓았어. 새해 건강하자” 라며 사진과 함께… 내가,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하며 답장을 했다. 

 이 달력은 한국의 SK 그룹에서 만든 것으로, 중앙에 크게 역동적인 서체가 있고 주변에 작품의 유래와 설명 글이 적혀 있다. 해설이 전부 한자로 되어 있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디자인이 유식해 보인다. 종이 재질은 고급 수채화 용지(아르쉬/Arches)를 사용해, 잉크의 번짐과 투명도가 마치 한지에 먹으로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크기도 세로 164 X 가로 62 cm이어서, 언뜻 보아도 1년만 쓰고 버리기에는 아까울 정도의 귀한 명품 달력이다.  

 

화면 캡처 2026-01-07 111453_.jpg

2009년에 제작된 달력인데, 2026년과 1월 1일이 같다. 달력은 조선 후기 송시열 선생의 서체로 각고(刻苦), ‘고통을 뼈에 새긴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달력은 각 월마다, 조선시대 명필들의 서체를 소개해 예술적 가치와 그 안에 담긴 선비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1월의 서체는 조선 후기 유학의 거두,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글씨다. 작품 가운데 있는 각고(刻苦)라는 글귀는 새길 각(刻)에 쓸 고(苦)로 ‘고통을 뼈에 새긴다’ 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애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나저나, 어떻게 2009년 달력이 2026년과 같을까? 달력이 같아지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해야 된다. 첫째, 1월 1일의 요일이 같아야 하며 둘째, 두 해 모두 윤년이 아닌 ‘평년’, 즉 2월이 28일까지여야 한다. 

 달력이 반복되는 이유는 1년 365일을 7일(1주)로 나누면 52주가 되고 나머지 1일이 남는다. 그래서 평년에는 매년 요일이 하루씩 밀리게 된다. 예를 들어 올해 생일이 월요일이면, 내년에는 화요일이 되는 이치다. 

 하지만, 4년마다 돌아오는 윤년(366일)은 요일을 이틀 밀어낸다. 이 ‘1일씩 밀림’과 ‘윤년의 2일 밀림’이 정교하게 맞물려 다시 원래의 요일로 돌아오는 주기가 바로 28년(7일 X 4년)이다. 다만, 양력 날짜와 요일은 100% 같지만, 음력과 그에 따른 절기(설날, 추석, 제사 등)는 날이 다르니 챙길 때 주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달력은 보통 6년, 11년, 11년 주기로 돌아오며, 이 숫자를 합치면 28년이 된다는 것이다.

# 2009년 +  6년 = 2015년 

# 2015년 + 11년 = 2026년

# 2026년 + 11년 = 2037년

 그러니까, 2009년의 달력은 2015년에 벌써 한번 더 쓸 수 있었고, 올해 2026년에 다시 돌아왔으며, 다음에는 2037년에 똑같이 사용될 수 있다. 글쎄 그때까지 우리가 살아 있을지, 달력을 보관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니, 눈을 뜨면 달력을 보며 하루를 시작했지 싶다. 박완서 작가는 1997년에 쓴 <모독>이라는 산문집에서 우리가 달력이라는 ‘숫자’에 집착 하느라, 그 숫자가 품고 있는 실제 삶의 질을 놓치고 있다고 꼬집는다. 

 

화면 캡처 2026-01-07 111507_.jpg

박완서 작가는 ‘빡빡하게 적힌 일정표는 유능함의 증거일지 모르나, 영혼의 입장에서는 모독(冒瀆)에 가깝다’라고 했다.

 

 

 “우리는 달력의 숫자를 지워가는 것으로 시간을 산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숫자 뒤에 숨은 것은 우리 삶의 생동하는 고통과 기쁨이다” 라며, 숫자에 맞춰 약속을 잡고 마감을 지키며 바쁘게 살지만, 정작 숫자가 가리키는 동안 내가 어떤 마음의 동요가 있었는지는 무시하고 살기 일쑤다. 작가는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시간, ‘여백의 시간’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한다.

 “빡빡하게 적힌 일정표는 유능함의 증거일지 모르나, 영혼의 입장에서는 모독(冒瀆)에 가깝다. 달력의 하얀 여백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숨구멍이다.”

 그녀는 살아 있는 시간을 달력의 숫자로 가두는 것은 숫자에 대한 모독이라며 숫자의 감옥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질 때, 비로소 인간은 존엄해진다는 논리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 달력 속의 숫자는 ‘언제까지 일을 마쳐야 한다’, ‘누구를 만나야 한다’는 구속과 지배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오늘 하루 아무 일 없이, 약속 없이 보냈어도 시간을 낭비했다는 느낌을 갖지 말아야겠다. 텅 빈 시간이야 말로 오롯이 내 시간이 아닌가?

 몇 년 전, 한국에 있는 딸아이의 집에 손녀를 보러 갔던 일이 생각난다. “엄마, 아빠하고 근처 보건소에 좀 갔다 와” 해서 무슨 일 인가? 싶었다. 딸이 어느 <육아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보니, 노인들이 아기를 돌보려면 먼저 치매 검사를 해야 한다는 거다. 처음 듣는 소리여서 조금 섭섭하고 기분도 상했지만, 요즘 젊은것들이 하는 짓이 우리 때와 다르니, 애써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내 손녀를 위해서도 혹시 안전한 게 좋지 싶어, 보건소(치매안심센터)에 아내와 함께 갔다.

 어르신들의 치매 검사는 보통 CIST(인지선별검사)를 한다.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것이,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인가요?” 그리고 그 다음이 “지금 여기가 어디인가요, 오늘이 무슨 요일인가요?” 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아주 쉬워 보이지만, 치매 초기 단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시간과 장소에 대한 감각’이 흐려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고 한다. 다행히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지만, 요즘 다시 검사를 하면 그나마도 이룰지 모를 일이다.

 사실 고백하면 원고 마감이나, 약속 때문에 요일은 잘 기억하지만, ‘오늘이 며칠 인지?’는 깜빡깜빡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약속도 주로 1~2주 정도 뒤까지 잡고, 그 이후는 일정표의 메모를 봐야 알 수 있다.

뭐, 어쩌겠는가? 이제 ‘달력’은 스마트 폰 안에 있고, 기억은 겨우 2 주치 용량뿐이니… 그래도 박완서 선생은 “노년의 삶은 마치 저녁노을 같아서, 가장 짧지만 가장 찬란한 빛을 낸다”고 했다. 나도 작가가 예찬한 ‘여백의 시간’ 속에서 하루의 평안을 채우며, 또 한 해를 맞는다.

 

20251211-1012126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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