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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자

박엘리야(문협회원)


Updated -- Jan 28 2026 05:18 PM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an 08 2026 11:38 AM

수필이 있는 뜨락(19)


육중한 나무문을 열었다. 저 멀리 서 있던 어느 노승이 나에게 무어라 중국어로 외쳤다. 중국어를 모르는 나는 그것이 다시 나가라는 뜻인지 아니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몰라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노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중국어로 계속해서 나에게 외쳤다.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친절하게도 손을 소독하라는 뜻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허둥지둥 손을 소독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노란 조끼를 입은 봉사자 두어 명은 기념품 판매대에 서서 무언가를 포장하느라 바빠 보였다. 절의 내벽은 작은 불상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층층이 쌓인 불상들은 몇천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금박을 입고 손가락과 이마를 오색진주로 치장을 한 커다란 불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제 몸에 그런 번쩍거리는 것들이 둘려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는 듯 불상들의 입매는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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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be Stock

 

누군가가 내 옆에 섰다. 내게 소리를 치던 노승이었다. "무어 필요한 거 있어?" 다행히도 영어로 물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내가 답했다. "너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구나." 두껍고 커다란 안경 때문에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는 노승이 내 쪽을 향해 말했다. "제 숙소가 요 앞이라서 들렀어요." 예상 밖의 문장에 할 말을 잃은 나는 무언가라도 답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 너는 관광객인 거구나." 한결같은 어조로 노승이 답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 집은 여기서 차로 두어 시간 거리 이긴 해요". 노승은 말을 멈추더니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점심 먹었어?" "아니요."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와 버렸다. "따라와." 노승이 등을 돌리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나는 노란 승복을 뒤따라갔다. 노승은 가다가 멈춰서더니 판매대에 있던 봉사자들의 기념사진을 찍어 주었다. 뒤돌아 나를 보며 쑥스러운 듯 웃기에 나도 따라 웃었다.

회색 복도를 돌아 절 뒤쪽으로 들어서니 널찍한 식당이 있었다. 이미 식사 시간이 끝났는지 식당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노승은 앞치마를 두른 봉사자 한 명에게 무어라 하더니 나를 맡기고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봉사자는 천으로 덮여 있던 음식들을 다시 차려주고는 먹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나는 두부와 야채로 만든 음식들을 퍼다가 커다란 원탁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을 먹다가 문득 옆을 보니 노승이 저 멀리 나를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손을 들어 인사를 해야 할지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노승은 이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개를 다시 숙여 내 앞에 놓인 밥을 마저 먹었다. 머릿속엔 길을 잃은 것 같다던 노승의 말이 문득 문득 밟혔다. 내가 길을 잃었나?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한 뭉텅이의 먼지처럼 마룻바닥을 정처 없이 떠다니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저들에게는 내가 길을 잃은 처지로 보일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옆에 있던 과자까지 가져와 먹고 있는데 노승이 또 나에게 시선을 두며 지나가고 있었다. 길 잃은 자가 밥을 잘 먹고 있나 보살피는 것처럼. 과자를 쥔 손은 주저하는 새에 인사할 기회를 또 놓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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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be Stock

 

본당으로 돌아왔다.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천장에 달린 수많은 풍등을 바라보았다. 빨간 풍등 밑에는 길게 달린 노란 천들이 앞뒤로 흔들렸다. 풍등에 달린 천에는 개개인의 바람이 적힌 글자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검은 글귀들은 너무나 무거워 보였다. 풍등이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게 꼭 붙잡고 있는 것처럼. 공간을 채운 염원의 자기장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불상이 있었다. 풍등을 닮은 입꼬리를 하고 이들의 염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듣고만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아니다, 사실 나는 길을 잃은 게 아니다. 저들에게는 그게 그거일지 몰라도 나는 그저 가야 할 길이 없는 것이다. 내게는 염원할 것도, 염원할 곳도 없다. 내 발밑에는 단단한 땅이 있고 머리 위에는 파란 하늘이 있으며 나에겐 그게 전부다. 나는 자유롭다. 목적지가 없는 내게는 소원도 의무도 없다. 다만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그 자유가 때때로 버거워질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자유를 택한다. 아니 자유가 나를 택했던가.

진정 자유로운 자에게 바치는 염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향내가 코로 흘러 들어왔다가 나갔다.

 

화면 캡처 2026-01-07 17283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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