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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획기사

피란수도 부산에 내려온 ‘성자’...

인류애로 기아·재난 맞서 싸우다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an 10 2026 08:26 AM

리처드 위드컴(Richard Seabury Whitcomb, 1894~1982) 미국 육군 준장


1953년 11월 27일. 아침부터 부산 날씨는 평소와 달랐다. 최저 기온(복병산 관측소 기준)이 영상 3도이고 낮 최고 6도에 머무르더니, 일몰 직후 다시 3도로 내려갔다. 부산의 11월 말 평년 낮 기온이 13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확실히 추운 날이었다. 바람도 세찼다. 초속 10m 내외 강풍이 북쪽에서 계속 불어왔다. 습도는 21%로 매우 건조했다. 추위, 바람, 마른 공기. 이 세 가지 기상 요소는 부산 시내에 곧 닥쳐올 대재앙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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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전 대화재 직후인 1953년 겨울 부산 중구 40계단 주변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스(한국저작권위원회)

 

이날은 서울도 아침 기온이 영하 3도까지 떨어지며 추웠다. 대통령 이승만은 중화민국(대만) 총통 장제스(장개석)를 만나기 위해 오전 8시 30분 여의도 비행장을 출발했다. 한국 정부는 타이베이 송산비행장(지금의 쑹산국제공항)까지 6시간 비행할 수 있는 여객기를 구할 수 없어, 유엔군사령부에서 존 헐 사령관 전용기(록히드 컨스텔레이션)를 빌려야 했다.

6·25전쟁은 4개월 전 휴전협정으로 중단된 상태였다. 대규모 교전이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불안한 정세에서, 당시 한국의 대(對)대만 외교는 대미 외교 다음으로 중요한 안보 과제였다. 중화민국(국민당)은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패해 대만섬까지 밀려난 처지였지만, 여전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승계)으로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승만과 장제스는 공산당을 상대로 치열한 전쟁(국공내전·한국전쟁)을 치른 ‘반공 지도자’란 점에서 강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총 세 차례 있었던 이승만-장제스 만남 중 이때가 유일한 ‘정상회담’이다. 1차 회담은 1947년 4월 난징에서 있었는데, 당시 장제스는 국민정부 주석이었지만 한국은 미군정 기간이어서 이승만은 정객에 불과했다. 2차 회담은 1949년 8월 한국 진해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이승만이 대통령이었으나 장제스가 국공내전 전황 악화로 총통 자리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다. 마지막 회담이 바로 1953년 11월. 이승만은 재선 대통령이었고, 본거지를 대만으로 옮긴 장제스는 다시 총통으로 복귀한 뒤였다.)

두 정상은 공동의 적 공산주의 국가들을 견제할 ‘반공동맹’ 결성을 위해 만났다. 한중일 3국(당시는 ‘중’이라고 하면 대만을 의미했다)이 참여하는 반공 삼각동맹을 결성하려 했던 장제스는 먼저 한국에 손을 내밀었다. 이승만은 대만과 동맹을 체결하면 미군이 철수할 수 있다고 걱정해 이 제안을 꺼렸지만, 11월 중순 방한한 리처드 닉슨 미국 부통령으로부터 대만 방문을 권유받은 뒤 타이베이행 비행기에 오를 결심을 했다. 국민당 정부와 반공통일전선을 결성한 뒤, 미국·필리핀 등 다른 국가들을 끌어들여 태평양 동맹으로 격상시키자는 게 이승만의 복안이었다. 이승만은 이번 대만 방문에서 장제스에게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는데, 그때까지 수훈자는 이승만 본인 및 초대 부통령 이시영을 빼면 제임스 밴플리트 미 육군 대장(8군사령관)이 유일했다.
 


부산역전 대화재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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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 현장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존 헐 유엔 군사령관. 대통령기록관

 

그렇게 장제스가 이승만을 위해 만찬을 열고, 한국-대만 밀월이 무르익고 있던 11월 27일 밤. 부산에선 정부 수립 후 최대 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오후 8시쯤 중구 영주동 뒷산 판자촌에서 최초 발화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어느 민가 다다미방에 설치된 난로(어떤 보도에선 조리용 풍로)에서 불씨가 번지기 시작했다. 피란민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도시 부산은 동네마다 판잣집이 즐비(3만5,000채 추정)했고, 겨울이면 판자촌 난방·조리기구에서 시작된 크고 작은 화재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 도시 적정 수용인원(30만 명)의 세 배에 달하는 인구(1953년 82만 명)로 인해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렸다.

그날은 특히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구봉산을 넘어온 북풍은 초속 10m 이상 빠른 속도로 도심을 향해 남하했고, 불씨는 메마른 바람을 타고 항구 쪽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영주동(메리놀병원 인근)에서 시작된 불은 동광동(40계단), 중앙동(현재 중앙역)을 거쳐 구 부산역(현재 중앙동 무역회관 인근)을 집어삼킬 정도로 커졌다. 판잣집 주인들은 비바람을 막기 위해 미군부대에서 나온 기름종이를 가져다 썼는데, 이 종이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조선일보는 화재 발생 다섯 시간 후인 28일 오전 1시 중앙동 일대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화염이 50척(약 15m) 높이로 하늘을 찌르고 300척(90m) 넓이의 엄청난 불바다를 이루어 부산역 앞 넓은 길을 뛰어넘고 있다.” 부산일보 현장 기자는 ‘불바다를 가다’라는 제목의 르포기사에서 “판잣집이 송두리째 바람에 날려 이곳저곳에 떨어지며 새로운 불씨를 뿌리자, 마치 기관차가 달리는 듯한 폭음과 울부짖는 아우성 소리가 났다”고 적었다. 주민들이 급히 수레에 싣던 이삿짐이 운반도 하기 전 다 타버릴 정도로 불 번지는 속도가 빨랐다.

대화재는 28일 오전 10시까지 14시간 동안 부산역전 일대를 다 태웠고, 이 불로 주택 3,132채가 전소됐다. 부산일보, 부산방송국(KBS총국), 부산우편국, 철도국, 부산역, 주한미기지사령부, 합동통신, 부산세관 등 이 일대 중요 건물이 모두 불에 탔다. 사상자가 29명, 이재민은 6,000여 세대 3만 명에 이르렀다. 재산 피해액은 총 177억 환으로 추산됐는데, 1953년 전체 정부 예산이 284억 환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부산역전 대화재가 얼마나 큰 재난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부산의 구세주’ 위트컴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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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부터 1954년까지 부산 주둔 미 육군 제2군수사령부 사령관을 지낸 리처드 위트컴 준장.

 

이재민 3만 명. 당시 부산 인구(84만 명)의 3.7%가 하루아침에 집도 없이 추운 길바닥에 나앉았다. 하필 대통령 해외 방문 중 대형 참사가 벌어지자 백두진 국무총리가 재난 사령탑을 맡았고, 내무부 사회부(복지부) 국방부 등 관계 장관들이 부산으로 급파돼 현장 수습을 담당했다. 경남도와 부산시도 구호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며 이재민에 대한 의식주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는 이 재난을 스스로 수습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구호물자와 재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미 전쟁으로 산업시설이 다 파괴돼 국가가 세금을 거둘 곳이 없었고 그나마 모인 나랏돈마저 전쟁에 다 써버린 터라, 정부 곳간에 돈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의복과 식량은 어찌어찌 준비한다 해도, 거처가 가장 문제였다. 11월 29일 정오 기준으로 부산구호본부가 부두수용소, 남도극장, 영선국민학교 등에 수용하고 있다고 밝힌 이재민은 470세대, 2,800여 명이었다. 전체 이재민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금자리를 잃고 길거리를 떠도는 주민이 많았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거리에서 방황하는 이재민을 위해, 당국에서는 화재를 면한 주민들로 하여금 주먹밥을 갹출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정부가 일반 시민들에게 이재민 끼니를 반강제로 떠넘겨야 했을 정도로 당시 상황은 열악했다.

이때 결정적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리처드 위트컴 미 육군 제2군수사령관(준장)이다. 제2군수사령부(옛 부산군수사령부)는 미8군 예하 부대 및 국군 부대에 대한 군수지원, 보급, 수송 등을 맡은 부대였다. 위트컴은 2차대전 유럽 전선에서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고 불린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군수부대장을 역임했고, 1945년 필리핀 마닐라 항만 지휘관을 지낸 병참 분야 최고 전문 장교였다. 캐나다 뉴펀들랜드 주둔 부대 사령관이던 그는 한국전쟁 끝 무렵인 1953년 7월 23일부터 부산 주둔 제2군수사령부를 맡았다.

부임 4개월 만에 대재앙을 접한 위트컴은 길바닥에서 배를 곯고 있는 부산 시민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미군 창고를 열었다. 미 국방부가 발행하는 일간신문 성조지(The Stars and Stripes)의 당시 기사를 보면, 위트컴은 매일 2만3,100명분의 식량(ration)을 풀었다. 여기에 더해 미군은 담요, 난방기구, 텐트 등 구호품을 제공했다. 위트컴은 화재 이튿날부터 공병부대를 투입해 피해 지역 정리 작업에 나섰고, 미군 부대에 이재민 등 4만 명이 기거할 수 있는 임시 천막촌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안성기·박중훈 주연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촬영 장소이기도 한 동광동 40계단(대화재로 위치 변경) 근처엔 당시 미군이 설치한 이재민 텐트촌이 들어섰다.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을 사실상 대신한 위트컴의 활약은 펜타곤 수뇌부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화재 직후 부산을 방문한 찰스 토머스(나중에 해군장관) 미 국방부 군수차관보는 귀국 후 위트컴에게 서신을 보내 “장군의 지휘하에 있는 장병들의 사기와 그들의 헌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장군의 부대원들이 어떻게 나라를 위해 일하는지 직접 지켜본 나는 미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위트컴의 역할은 긴급 구제와 임시 텐트촌 부설에 그치지 않고, 항구적인 도시 재건 사업으로 이어졌다. 1953년 12월 19일 경남도와 부산시는 “미군과 함께 화재 피해 지역을 현대적인 상업·주거지역으로 다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는데, 이 계획의 미국 측 책임자가 바로 위트컴이었다. 성조지가 부산역전 대화재 1주년을 맞아 1954년 12월 게재한 기획기사를 보면, 당시 미 육군은 부산 도심 재건을 “역사상 (미군이 수행한) 가장 거대한 민간 원조 계획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전투부대가 없는 후방 도시에서 상시 근무하는 유일한 미군 장성이었던 위트컴은 부산에서 ‘미국의 얼굴’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미군이 남긴 행사 관련 기록을 보면, 위트컴이 각종 민군 행사에서 미국 측 대표로 등장하는 모습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위트컴은 1954년 9월 부산 재건을 위한 모금운동 행사에서 갓을 쓰고 도포를 걸친 채 부산 시내를 행진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전속부관 마사 보일스 대위도 얹은머리를 한 채로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동반했다.
 


부산 교육과 의료에도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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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위트컴 장군과 그의 전속부관 마사 보일스 대위가 1954년 9월 부산 시내에서 열린 모금행사에 한복을 입고 참여했다. 미 성조지

 

위트컴의 국내 행적을 오랫동안 취재했던 오상준 국제신문 기자에 따르면, 위트컴은 의식주 이외에 부산 지역 교육·의료 분야에도 큰 기여를 아끼지 않았다. 대표적 업적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경남지사를 설득해 부산대 장전캠퍼스(메인 캠퍼스) 부지 165만㎡(약 50만 평) 마련에 기여한 것이다. 위트컴은 부산대의 협조 요청을 받고 캠퍼스 건설에 25만 달러어치의 자재 제공을 약속했으며, 나중에 학생들이 통학에 불편을 겪자 미군 공병부대를 동원해 버스 종점인 온천장(온천동)에서부터 부산대 무지개문(장전동)까지 1.6㎞ 구간 도로를 닦아줬다.

미국 메리놀(Maryknoll) 수녀회의 의료봉사 거점이던 메리놀수녀의원(진료소)을 ‘메리놀병원’으로 키운 공로자도 위트컴이다. 그는 미군의 대한원조프로그램(AFAK)을 통해 병원 건물 신축을 지원했고, 공식 지원 외에 미군 장병들이 월급 1%를 병원 공사비로 기부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 덕분에 메리놀병원은 지상 3층, 16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으로 거듭났다. 성분도병원, 독일적십자병원 등 다른 의료기관 건립에도 위트컴의 도움이 있었다.

위트컴이 조산소를 설치했던 일화도 인상적이다. 1954년 5월 영도 피란민촌을 순시하던 위트컴은 만삭 임산부가 보리밭에 몸을 숨기고 아이를 낳는 비참한 장면을 목격했다. 부산 최초 산부인과 일신부인병원을 열었던 매켄지 자매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출산의 80% 이상이 집에서 이뤄진 가정분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피란촌 천막 하나에는 일고여덟 세대 40여 명이 한꺼번에 거주했기 때문에 사적 공간이 존재할 수 없었다. 결국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외부 공간(보리밭)에서 분만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를 본 위트컴은 조산원을 세웠다. 일신부인병원이 1955년 새 건물로 옮겨갈 수 있었던 것도 위트컴이 관여한 AFAK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한국에 바친 인생 후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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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2월 연령 정년(60세)을 맞아 군복을 벗은 위트컴은 잠시 미국으로 갔다가 이내 ‘제2의 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승만의 정치고문 역할을 하며 한미 정부 가교 역할을 자임하는 한편, 제임스 벤플리트 전 미8군사령관과 함께 전후 구호사업 단체 한미재단(American Korean Foundation)의 활동을 주도하며 재단 이사직을 수행했다. 미국 내 친한파 인사들로 구성된 한미재단은 군사·경제 원조가 절실히 필요했던 한국의 사정을 미 정부에 충실히 전달하는 창구였다. 1952~1976년 한미재단을 통해 약 5,000만 달러의 원조(현금+기타 지원)가 이뤄졌는데, 이승만·박정희 등 1950·60년대 한국 대통령들이 미국을 방문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일정이 바로 한미재단에서의 연설이었다.

인생 후반전을 한국에서 보내기로 한 위트컴이 직시한 것은 전재고아(戰災孤兒) 문제였다. 당시로서 고아 문제는 전쟁을 끝낸 이 나라가 풀어야 할 가장 심각한 난제 중 하나였다. 전쟁으로 부모가 사망하거나(고아), 보호자에게 버림받거나(기아), 부모를 잃고 길에서 헤매는(미아) 아이들이 대략 10만 명에 달했다. 전쟁 직전인 1953년 4월 내무부 치안국(경찰)이 추산한 수치는 17만 명에 이르렀다. 1953년 기준 전국 보육시설 440곳에 수용된 아이들이 약 5만4,000명이었으니, 상당수 나머지 고아들은 ‘부랑아’ 취급을 받으며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심부름과 간단한 통역 업무 수행)를 했다면 매우 잘 풀린 경우이고, 대부분은 구두닦이(슈샤인보이) 신문팔이(뉴스보이) 넝마주이(시라이) 껌팔이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조직에 속해 ‘왕초’의 통제를 받으며 거리로 구걸을 나선 아이들도 많았다.

위트컴은 전역 후 이런 전쟁고아들을 돕기 위한 활동에 주력했는데, 그가 직접 지원한 고아원만 53개에 달했다. 위트컴은 전쟁고아들을 돕는 과정에서 천안 익선원(아동복지시설)을 운영했던 사회사업가 한묘숙(1927~2017)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기도 했다.
 


“나를 한국에 묻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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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11일 제19회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기념식이 열린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서 6·25전쟁 유엔군 참전용사가 전우들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1982년 위트컴은 “북한에 남은 미군 장병의 유해를 고국 땅으로 보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했다. 그는 생전부터 북한 땅에 묻힌 미군 유해를 되찾아오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장진호 전투(1950년 11~12월)에서 사망한 미 육군과 해병대원의 유해 반환을 위해 노력했다. 전투부대 지휘관이 아니었던 그가 유해 발굴에 각별히 힘을 쏟았던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신문 기사에 위트컴이 판문점에서 이뤄진 유엔군-공산군 간 유해 교환에 관여하거나, 돌아온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행사에 참여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해 송환 업무를 수행하며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 유언은 아직 결실을 맺지 못했다.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에 따르면, 6·25전쟁 중 발생한 미군 실종자는 8,157명인데 이 중 7,386명이 아직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북한에 묻혀 있는 유해는 약 5,300구로 추정된다. 북한은 휴전 이듬해인 1954년 유엔군 유해 4,000여 구를 반환(글로리 작전)했지만, 이후로는 1990년 미군 유해 208상자, 2018년 55상자만 돌려보내는 등 유해 발굴과 송환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의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로는 유해 송환 문제에 전혀 진전이 없다.

위트컴의 다른 유언은 “나를 부산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미 대륙 정중앙 캔자스에서 태어나 38년 군 생활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녔던 그는 마지막 임지이자 제2의 고향 부산에서 영면 중이다.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2,336명의 유엔군 참전용사 중 유일한 장성급 장교(장군)가 바로 위트컴이다.

6·25 전엔 한국과 아무런 인연을 맺지도 않았고, 심지어 한국이란 나라 자체를 몰랐던 유엔군 참전용사 중엔 수십 년 후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며 실제 한국에서 영면한 사례가 적지 않다. ‘부산의 성자’ 위트컴은 그가 사랑했던 도시에 묻혔고, 캐나다 참전용사 아치볼드 허시는 “한국에서 함께 싸우다 전사한 형(조셉)과 함께 잠들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며 2012년 유엔기념공원 조셉의 무덤에 합장됐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전우들을 평생 그리워하던 네덜란드 용사 니콜라스 프란스 웨셀도 63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2016년 유엔기념공원에서 영면했다.

죽음이 곧 닥쳐올 것을 감지하면, 인간은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긴 곳을 영면의 장소로 떠올린다. 보통은 고향이나 부모·형제·배우자가 잠든 곳을 생각하겠지만, 참전용사들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을 자극하는 장소는 가장 꽃다웠던 청춘을 바친 전장인 경우가 많다. 전선의 공포, 날씨와의 사투, 승리의 희열, 민간인 피해자를 향한 연민, 전우의 죽음 뒤 찾아오는 상실감 등.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고 원초적인 희로애락이 바로 전쟁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을 ‘또 다른 고향’이나 ‘제2의 고향’으로 일컫는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말은 그래서 결코 거짓이나 과장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이영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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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캐나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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