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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기슭에 도자기 가마터 40여 곳
일제, 발굴 명목 곳곳 훼손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pr 18 2026 11:14 AM
조선총독부, 왜 계룡산 분청자기 가마터를 뒤졌나
대한민국의 도자문화를 대표하는 도자기는 뭘까. 백자 달항아리 혹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
현대에 들어서 한국적 아름다움이 재평가를 받는 장르가 바로 분청자(사)기다. 우리 청자와 백자는 각기 고유한 미학을 표현하는 것으로 평가받지만, 한국인의 정서가 가장 잘 담긴 도자미학의 정수는 분청자기이며 조선 초기에 청자의 미적 전통을 이어받아 확립됐다.
분청자기는 또 일본 도자예술의 원조로, 우리 문화가 국경을 넘어 다른 문화로 확산되어 깊이 뿌리 박힌 대표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미 500년 전에 분청자기가 K컬처의 원류를 일본에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충남 계룡산의 학봉리에서 만들어진 분청도자를 보노라면 ‘역시! 우리 것이야!’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된다.
계룡산, 왕도를 꿈꾸는 터무니(地文)
공주 학봉리 전경. 1960년대 초반 공주학아카이브
‘계룡’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감상 요즘 어린이들은 익룡, 프레로닥틸(Prerodactyl)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산의 이름이 인연이 된 것인지 모르지만, 미국 서부에서 출토된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완벽한 공룡 화석이 학봉리가 있는 골짜기 북사면 기슭 ‘계룡산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다만 계룡이라는 이름은 공룡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수천만 년의 풍상으로 만들어진 돌 봉우리가 연이어 있는 능선이, 멀리서 보면 닭벼슬처럼 생긴 모습이어서 계룡(鷄龍)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닭이 용이 된다는 뜻으로 갑사의 기둥과 바위에도 적혀 있지만, 닭이 백성이고 용이 왕이라는 해석도 있으니 힘들게 사는 세상이 뒤집혀 새로운 세상이 된다는 당시 사람들의 희구이었겠지만, 오늘날 언어로 바꾸면 바로 민주주의를 예언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산세가 수려하고 맑다고 표현하였는데, 금강에 닿아 있어서 물자가 풍부하고 천재가 적어서 사람들이 살 만한 곳이라고 평하였다. 또 정감록에는 신도안에 정씨가 왕조를 세워 800년을 통치할 것이라 하는 설이 있어서 조선시대 사람들이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곳에 몰려들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골짜기마다 기도터나 신집들이 자리 잡고 있다.
산의 기세가 백제가 이 산의 남쪽 금강에 기대어 웅진을 만들었고,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태조 이성계도 이곳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려고 궁궐을 지으려 시도한 적도 있었다. 오늘날 계룡산 자락을 깔고 앉은 세종시가 국도로서 미래를 꿈꾸고 있으니 이곳은 한반도의 중심, 배꼽이라고 생각할 만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풍성한 자연자원이 있다는 암시일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조선시대 도자기 공방들도 이 산의 생산력을 보여주고 있다.
학봉리 분청자기 가마터 유적지

대전 유성에서 1번 국도로 공주 쪽으로 고개를 넘어 가다가 좌측으로 보면, 큼직한 배가 앉은 듯한 형세의 골짜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도자 가마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곳이다. 15세기 초에서 16세기 사이에는 저녁이 되면 가마에서 나오는 장작 연기가 골짜기 아래에 고즈넉이 가라앉는 풍경을 연출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온천리 일대 관광마을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개울을 따라서는 동학사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왼쪽으로 사기천이 흐르는 길은 계룡대로 넘어가는 길이다. 이 두 길 사이에 동향 산사면 아래쪽에 지역 사람들이 ‘윗사기소’라고 부르는 학봉리 가마터 유적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 이뤄진 조사에 따르면 계룡산 기슭에는 40여 개소 이상의 도자기 가마터가 발견되었고, 학봉리가 있는 골짜기에서도 낮은 사면을 따라서 여러 지점에 가마들이 있었다. 당연히 분청사기를 비롯한 도편들도 다수 확인됐는데, 이 가운데 국가 사적으로 지정돼 보존되는 곳은 동학사 입구 갈림길에 있는 ‘학봉리 5호’ 가마터다. 사실 공주지역에서는 조선 이전의 아주 이른 시기의 청자가마들도 보이는데 학봉리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자기 생산의 전통이 대단히 오래된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가마는 거의 조선시대 초기의 분청자기나 백자를 생산한 요지이다.
조선 초기 공주에 설치된 두 곳의 자기소 가운데 하나가 이곳 학봉리에 있었던 이유는 뭘까. 조선 초기 도자기 수요가 급증하면서 해안지역에 분포된 가마터들이 내륙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자원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한 계룡산 지역에 밀집되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료 조달 등 생산 여건이 좋고 접근이 용이했던 학봉리 지역 골짜기는 가마 설치에 최적 장소였다. 경기도 광주의 사옹원이 관할하던 관요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학봉리에서 생산된 물건이 왕실과 관청에 공납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 지역의 도자기 생산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현하고 지속하려는 노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일제의 수상한 발굴, 분청도자 파편 채취가 목적이었나?
학봉리 가마5의 발굴 광경 중간 단계. 공주학아카이브
우리 전통 문화를 변질시키려는 일제의 시도는 학봉리에서도 자행됐다. 20세기 초, 즉 1927년 조선총독부 조사사업으로 노모리 겐(野守 健) 주도의 발굴이 이 지역에서 벌어졌다. 7개 지점에서 13개 가마유적을 발굴했는데, 조선고적도보에도 발굴 광경과 유물 사진을 수록하였다. 일부 백자요지가 있지만 대부분 분청자기를 생산하던 요지였다.
그런데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당시 발굴 사진을 보면, 유적을 ‘파헤쳤다!’고 할 정도로 거칠게 발굴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5호와 7호 가마에 대해서는 1990년대 국립박물관 주도의 발굴이 새로 이뤄졌고, 새로운 사실들이 확인됐다. 5호 가마는 길이가 50m에 달했고, 7호 가마의 길이도 31m로 분청자기 가마들 중에서는 압도적으로 큰 편이었다는 점이 확인됐다.
일제강점기 발굴의 오류들도 확인됐다. 여러 소성실을 연속해서 만든 칸가마의 바닥이 단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통으로 된 단일 오름가마 바닥이 경사진 것이라든지, 또는 한번만 축조된 것이 아니라 개축되어 가마 폭이 50~60㎝ 정도 확장되었다는 점도 확인됐다. 가마 속의 불기둥이 두 개가 아니라 일정한 간격으로 하나씩 소성실의 중앙에 있었다는 것도 확인됐는데, 이는 일제가 성급하게 벌인 발굴이 가마 구조에 대한 기초 정보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엉터리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마도 일본 도자의 기원지 확인 편집증이 어설픈 발굴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도굴이 극심하여 긴급 발굴도 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학봉리 분청자기 가마유적은 일제에 의한 우리 유산 훼손의 대표적 피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일제의 발굴은 오히려 이 지역 상황을 악화시켰다. 발굴 이후 일대의 다수의 가마가 훼손되어 사라졌고, 가마에 흩어진 도자기에 대한 불법 채취도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보물캐기식으로 도자기편 수집에 몰두하고 유적 보존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셈이다. 유적의 고고학적 가치에 비해 턱없이 초라한, 사적표시 간판만 서 있는 조그만 잔디공원으로만 조성됐다는 점에서 우리의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의식 수준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학봉리 출토 내자시 명 분청사기
학봉리 가마터 발굴에서 확인된 도자기 종류는 다양하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 초기의 청자에서 시작되어 조선 초기의 회청사기,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 그리고 백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자기가 발견됐다. 15세기 초엽에 세종이 명하여 조사한 자료에는 학봉리에서 ‘중급의 도자기’(品中)가 생산되고 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그 이전부터 활발한 생산 활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것은 흔히 ‘계룡산 분청자기’로 부르는 철화분청자기가 이 가마터에서 생산됐다는 점이다. 철화분청자기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사이에 제작된 걸 감안하면, 한국 도자문화가 고려 청자에서 조선 백자시대로 넘어가는 사이의 변동사를 간직한 가마터인 셈이다. 이와 관련, 도자에 새겨지는 그림의 역사에서도 금보다 비싼 청화(靑華, 코발트 안료)의 사용은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세종대에 금지됐다가, 안료 가격이 낮아진 조선 중기 이후에야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학봉리 가마들 중 재발굴된 5호와 7호 가마에서는 90% 이상이 분청사기다. 물론 백자, 흑유자기, 회청사기 파편 등이 수습되기는 했다. 장식 기법도 다양하여 상감, 박지, 조화, 귀얄, 철화 등의 기법이 복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중 철화기법으로 만든 분청사기가 대단히 독창적이다. 비싼 청화 대신 사용된 철채안료가 새로운 한국 도자기의 미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학봉리 도자기에 철화안료로 내자시(內資寺), 내섬지(內贍寺), 예빈시(禮賓寺) 등의 관사 이름이 적힌 도자기들이 발견되는데, 이것들이 바로 관청에 공납됐음을 보여준다. 흔히 도장을 찍거나 음각으로 관사명을 넣는 것이 일반적인데 학봉리 도자기에는 백토를 칠하고 그 위에 관사명을 흘려 쓴 것도 특징이다.
철화분청, 500년 전 K컬처의 원조

계룡산 철화분청 병
흥미로운 것은 조선에서는 중품이었던 계룡산 자기들이 이후 일본에서는 명품 대접을 받았다는 점이다. 계룡산 분위기를 이어받은 차 사발의 경우 일본으로 건너가면 고려다완(高麗磁椀)이라고 하여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분청자기 종류 다완 중에는 일본 국보로 지정된 것도 있다.
거친 태토로 만든 그릇에 백토를 여러 방식으로 씌우고 다양한 기법으로 문양을 넣은 분청자기에는 한국인의 심성이 맛깔스럽게 묻어 있다. 표면이 우그러진 작은 분청술병을 만지면서 한 도자기 애호가가 "사람의 따뜻한 피부 같다"고 감탄하는 걸 본 적도 있다. 그만큼 인간적인 도자기라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사실 다른 한편으로는 도자기 제작은 대단히 과학적이고 창의적이며 지난한 작업이다. 그래서 과학을 숭상하던 유럽 제국들은 근대까지도 도자기를 만들지 못하여 중국 것을 베끼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에 이후 화려한 일본 도자에 매료되기도 했다.
서양이 제작 기법을 알지 못했던 도자 기술이 우리 조선시대에는 분청사기로 새로운 도자문화 경지에 도달하였다. 당시 우리 선조들의 제작기법에는 장식기법의 창의성과 함께 ‘빨리빨리’ 그리고 ‘이러면 어때!’ 등으로 표현되는 한국적 품성이 배어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그런 품성이 두드러진다. △그릇의 거친 태토를 허연 백토로 분장(粉匠)하는 천연스러움 △‘휘익~’ 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듯한 붓의 자국이 선명한 귀얄 기법 △백토수에 그릇이 담길 때 ‘풍덩’ 소리가 날 듯한 덤벙분청에 내포된 높은 에너지의 속도감 △철분 때문에 어두운 색조의 태토와 도자기 표면을 덧씌운 백토가 이루는 극적 대비 △물고기나 꽃 등 일상 소재에 대한 해학적 표현 △알 듯 모를 듯한 모양의 추상적 거친 선으로 표현한 철화분청의 묘미 등이다. 이런 특징이 어우러져 세상의 다른 도자에서 볼 수 없는 한국미가 탄생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오늘날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심성을 달래어 주는 현대 카타르시즘 한국 미학의 원조가 아닐까라는 데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도자 미학이 바로 칼날 위에서 살아가야 했던 중세 일본인들을 매료시켰을 것이다. 일본에서 ‘고라이 자완’이라고 숭상하던 것 중에서 계룡산 분청이 특별히 사랑받았던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의 고유한 감성이 표현된 소위 ‘K컬처’의 원조가 철화분청이었던 것이다.
일본 도자기의 시조 이삼평을 기리는 기념공원
이삼평의 생애 설명판
소위 ‘계룡산 분청자기’의 본산인 이곳에 잔디밭으로 조성된 가마터는 인근의 ‘이삼평 공원’과 어울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이삼평(李參平, ?~1656)은 일본의 도조(陶祖), 즉 일본 도자의 비조로 추앙되는 인물인데, 공주 태생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 자기의 역사가 시작된 규슈 아리타(有田) 사람들이 와서 공원을 세웠다. 이삼평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뒤 아리타에 살면서 그곳에서 백토를 발견하고 1616년 뎅구다니(天狗谷)라는 곳에 가마를 만들어 백자를 일본 최초로 제작하고 보급했다. 아리타에서는 그의 신사가 있을 정도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충청도 지역의 도자에 대한 세종의 평가와 애착은 양녕대군 처소용이나 중국 사신용 접대용 도자를 충청도, 특히 공주지역 도공이 만든 것을 사용할 것으로 명(命)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이삼평은 이국에서도 도자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 뛰어난 지역 인재였을 것이다.
이삼평 사례는 한 집단이 인재를 대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한 사람의 인재가 국가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재가 그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사회가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삼평이 조선에 남아 도자기를 만들었으면 뛰어난 도공으로 남았겠지만, 도자 불모의 지역에서 선구적 노력을 기울이면서 역사에는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비극적 역사에 휘말려 타국에 끌려갔지만, 그는 일본이 유럽과의 도자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개화를 주도하는 발판을 만들어 줬다. 바로 그의 도자를 이어 발전된 이마리(伊馬里) 도자는 서구 귀족들의 최애품이었던 것이다.
40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오늘날 휴머노이드가 출현하는 이 시점에서도 필수적으로 고민해야 할 국가인재전략이다. 창의적이고 인류애가 넘치는 인재들이 마음 놓고 자신을 펼칠 수 있는 공간과 자원을 쥐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에 필요하다.
가까운 미래에 그러한 역사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박물관이 이곳 계룡산 골짜기에서 전 세계인을 맞이하는 날을 기대해본다. 아울러 이곳 시민들이 희망하는 ‘도도공주’(陶都公州·도자기 도시 공주)의 꿈도 곧 실현될 것으로 확신한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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