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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文才)로 왕권(王權)을 누른 천재시인 조식(曹植)
박형규(시인·토론토)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public@koreatimes.net)
- Apr 17 2026 10:59 AM
‘난세(亂世)의 간웅(奸雄)’으로 불리던 위왕(魏王) 조조(曹操, 155-220)는 유 씨 부인 소생의 맏아들 조앙(曹昻: 장수(張繡)와의 싸움에서 전사)과 변 씨 부인 소생의 조비(曹丕, 187-226), 조창(曹彰), 조식(曹植, 192-232), 조웅(曺熊)의 네 아들을 합쳐 총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조조는 조비와 조식과 함께 시문이 출중하여 후한(後漢) 헌제(獻帝) 통치기간인 건안(建安; 196-220)시대의 문학을 대표하는 ‘건안삼조(建安三曹)’로 불린다. 수많은 시문에서 조조는 호방하고 비장한 기상을, 조비는 우아하고 섬세한 기풍을, 조식은 웅장하고 화려한 기백을 과시했다.
변 씨 소생의 큰 아들 조비(曹丕)는 통이 크고 글재주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무예에도 자질을 보였으며, 성격도 원만하고 믿음직스러워 어릴 때부터 조조가 전쟁터에 데리고 다니며 실전경험을 쌓게 했다. 셋째인 조식(曹植)은 총기가 있고 문재가 아주 뛰어나 10 살 때부터 시를 지어 조조의 총애를 독차지하였고, 공융, 진림 등 건안칠자(建安七子)들과 사귀었으며, 오언시(五言詩)를 완성시킨 인물로 평가되면서 이백과 두보가 나오기 이전의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조조는 세자(世子) 책봉을 위해 문무를 겸비한 맏아들 조비와 시문에 뛰어난 셋째 아들 조식 사이에서 장고를 거듭하다 결국 조비를 세자로 간택했다. 처음엔 스승 양수(楊修)의 도움을 받은 조식이 부친 출타 시 부친에게 시를 지어 바침으로써 세자 책봉 경쟁에서 조비보다 우위를 점했지만, 발군의 모사(謀士) 가후(賈詡)의 조언을 받은 조비가 부친 출타 시 헌시(獻詩) 대신 단지 눈물로써 부친을 배웅하여 지극한 효심(孝心)을 가장함으로써 결국 부친으로부터 조식보다 더 돈독한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다.
조조가 66세에 죽자 맏아들 조비가 위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동생 조창이 부친상(父親喪)에 조문(弔問)하러 대군을 이끌고 오자, 조비는 조창 혼자 왕궁에 들어와 문상을 하게 한 뒤 곧바로 임지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조조가 생전에 총애하던 조식은 큰 형 조비가 두려워 조문하러 오지도 않자 결국 조비가 동생 조식을 조정의 연회석으로 불러들여 소 두 마리가 싸우는 그림인 ‘투우도(鬪牛圖)’를 보여주면서 죽음을 담보로 한 시제(詩題)를 내렸다.
"네가 문재(文才)를 타고났다고 선왕(先王)이 너의 재주를 높이 칭찬했다만 남의 문장일 수도 있으니 오늘 확인해 보겠다. 이 그림을 보고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 한 수를 지어라. 단 소 두 마리가 싸워서 한 마리는 우물 속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말(‘소[牛], 우물[井], 지다[敗], 죽다[亡]’는 말)은 사용하지 마라. 만일 제대로 시를 못 지으면 참수한다”고 협박조의 명령을 내리면서 자신의 보검을 끌러 재판관인 장수 허저(許禇)에게 주었다. 이에 조식은 조비의 추상 같은 명령이나 허저가 들고 있는 보검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눈을 지긋이 감은 채 걸음을 떼면서 시를 읊기 시작했다.

언스플래쉬
<死牛詩(사우시): 죽은 소의 시>
兩肉齊道行(양육제도행): 두 고깃덩이(‘두 마리 소’, 즉 ‘두 형제’ 비유) 나란히 길 가는데
頭上帶凹角(두상대요각): 머리 위에 오목한 뿔을 둘렀구나
相遇凸山下(상우철산하): 서로 봉긋한 산 밑에서 만나
欻起相唐突(훌기상당돌): 문득 서로 치받게 되었네
二敵不俱剛(이적불구강): 맞수가 다 굳세지는 못해
一肉臥土窟(일육와토굴): 한 고깃덩이(‘조식’ 자신 비유)는 흙구덩이에 쓰러졌구나
非是力不如(비시력불여):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盛氣不泄畢(성기부설필): 강성한 기운 다 못 쏟아서 일세
이 시가 조식이 일곱 걸음 만에 지었다는 저 유명한 칠보시(七步詩)다. 그러나 조비는 조식의 발걸음이 너무 느렸다고 트집을 잡으며, 이번에는 ‘형제(兄弟)’를 시제로 하되 형과 아우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는 시를 그 자리에서 바로 지으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이에 조식은 부친 조조를 콩깍지와 콩의 뿌리로, 형 조비를 콩깍지로, 조식 자신을 솥안에서 우는 콩으로 비유하는 시(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으니: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콩은 솥 안에서 우네: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본래 한 뿌리에서 낳거늘: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어찌 이리 심히 서로 볶아대는가: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를 즉석에서 읊었다. 이에 조비는 눈물을 흘리며 단을 내려와 조식을 끌어안는다. 공자(公子) 조식의 문재(文才)가 국왕(國王) 조비의 왕권(王權)을 압도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 조비는 조창과 조식 두 아우를 멀리 변방으로 내보내고, 한 곳에 뿌리박지 못하도록 계속 임지(任地)를 옮기게 하고 엄격히 감시한 결과, 얼마 후 조창은 병을 얻어 죽는다.
그 후 조식은 자신의 글재주를 써 주기를 바라는 글을 여러 번 조정에 올렸지만 번번이 조비에게 거절당했고 입조(入朝)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도 조식의 출중한 문학적 재능에 대한 시기심에다, 세자 자리를 놓고 다투었던 원한이 조비의 가슴 속에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조식도 동아왕(東阿王), 진사왕(陳思王) 등의 실권과 자유가 없는 변방의 미관말직을 전전하며 울분과 통한을 달래다가 병을 얻어 마흔 한 살에 숨을 거둔다. 막내인 조웅은 큰 형 조비가 작은 형들을 핍박하자 겁을 먹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조비는 제위에 오른 지 7년 만에 병으로 죽고 만다. 마흔 살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조의 네 아들 모두 형제간의 치열한 골육상쟁(骨肉相爭)으로 인해 단명(短命)하고 말았다. 이어 조비의 어린 태자 조예(曹叡, 205-239)가 제위를 이어받지만 그도 35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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