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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완전 ‘밤티’네!
젠지가 스스로를 지키는 말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pr 26 2026 10:32 AM
올해 초부터였을 거다. 인스타 피드에서 내내 그 단어가 계속 눈에 밟혔다.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매번 만났다. 밤티 같다, 완전 밤티, 밤티 느낌. 맥락을 보면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 뭔지 몰랐다. 그냥 넘겼다. 또 나왔다. 또 넘겼다. 그러다 결국 나는 댓글을 달았다.
"밤티가 뭐예요?"
"그것도 몰라? 노땅 티내네. 못생겼다는 말이잖아."
역시 온라인 세상에서는 욕을 먹어야만 겨우 하나 배울 수 있다.
2025년부터 젠Z및 MZ 세대들에게 유행하기 시작한 '밤티' 밈 유래 사진. 게임 라인플레이 유저의 아바타와 대화가 캡처되어 밈이 되었다. 나무위키 '밤티' 페이지 이미지 캡처
인공지능(AI)이 알려준 밤티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시작은 아바타 꾸미기 게임 라인플레이였다. '밤티'라는 닉네임의 유저가 있었다. 긴 머리에 수염, 묘한 코디의 아바타. 그걸 본 누군가가 댓글을 남겼다. "밤티님 죄송한데 진짜 개X 같이 생기셨네요." 이 한 문장이 캡처되어 퍼졌다. 커뮤니티를 돌고 X를 돌고 인스타그램까지 흘러들었다. 웃기고 황당한 이 댓글이 밈이 된 건 단순히 무례해서가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저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다들 돌려 말하는 시대에, 저 댓글은 너무 날것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웃겼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이후였다. 저 밈이 유행하며 우리가 정상적으로 쓰던 "못생겼다"는 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대신 이런 말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밤티 같다. 미감이 별로다. 내 취향은 아닌데. 같은 말이다. 뜻은 똑같다. 그런데 아무도 "못생겼다"고 하지 않는다.
올해 초 각종 연구소에서는 젠지 분석 보고서를 쏟아냈다. 읽다 보면 한결같은 말뿐이었다. 젠지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자기만의 기준이 있다. 자기 확신의 세대. 피드도 그랬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내 기준이 곧 미학이다. 선언들이 넘쳤고, 읽으면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피드의 댓글 창을 내리면 어김없이 두바이도 있고, 봄동 비빔밥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또 별개로 밤티가 있었다. 미감이 별로에요가 있었다. 혐오가 가득한데, 아주 악플이 정중했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고 쓴 게시물 아래, 당신은 밤티 같다고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플랫폼에서, 같은 세대가, 같은 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못생겼다"는 욕은, 그걸 듣는 사람도 안다. 그래서 방어할 수 있다. 저 사람이 나쁜 거라고, 저건 그냥 악플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화를 내도 된다. 그런데 "밤티 같다"는 다르다. 욕처럼 들리지 않기 때문에 반박하기가 애매하다. 감정적으로 받아치면 오히려 내가 예민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더 나쁜 건, 밤티가 뭔지 몰라서 묻는 순간 내가 직접 그 뜻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검색을 하든, 누군가에게 묻든. 상처는 뒤늦게, 혼자 완성된다. 말한 사람은 그 자리에 없다. 이미 깔끔하게 빠져나갔다. 정확하지 않은 말이 오히려 더 정확하게 꽂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못생겼다는 직접적인 말은 방어가 된다. 밤티라는 애매한 말은 방어가 안 된다.
SNS에도 '밤티' 뜻을 설명해주는 콘텐츠와 밤티 밈을 이용한 마케팅 콘텐츠를 많이 볼 수 있다. SNS 인스타그램 '밤티' 관련 연관 게시물 갈무리
이 쿠션어는 상대를 위한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텍스트다.
"못생겼다"는 I-message다. 내 기준에 너는 미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공격하는 사람의 취향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반박이 된다. 그건 네 취향이잖아, 라고 말할 수 있다. I-message와 You-message는 심리학자 토마스 고든이 정립한 커뮤니케이션 개념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공격의 주어 자체가 사라지는 구조를 It-message로 부르고자 한다. "밤티 같다"가 그렇다. 너라는 존재 자체가 가진 설계적 결함이라는 말이다. 공격하는 나는 사라지고, 객관적으로 미달인 너만 남는다. 내가 널 싫어하는 게 아니라, 네가 밤티라서 문제인 거야. 공격의 책임이 상대의 존재 자체에 지워진다. 이건 욕보다 훨씬 정교하다.
"미감이 없다"는 더 지독하다. 이건 단순히 외모를 건드리는 말이 아니다. 그 사람의 지능, 취향, 살아온 궤적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다. 너는 아름다움을 알아볼 줄도, 가질 줄도 모르는 인간이다. 촌스러운 건 고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밤티, 미감 없음은 그 사람의 본질에 새겨진 낙인이다. 구제 불능이라는 선고다. 단순한 욕설보다 훨씬 위계적이고, 훨씬 오래 남는다.
시인으로서 나는 이 지점에서 자꾸 생각을 되짚어보게 된다. 시는 응시하는 언어다. 울고 있는 등의 배후를 똑바로 쳐다본다. 나를 허물어서라도 타자의 진실을 마주하려 한다. 그런데 밤티는 정반대다. 상대를 한 단어로 규정하고 시선을 돌려버린다. 상대를 비추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는 저렇지 않아, 라고 안심하는 자기 자신의 얼굴만 보고 있는 거다. 거울 같은 문장이다. 밤티라고 부르는 순간, 저건 추해, 저건 미감이 없어, 라고 선을 그으면서 그 선 안쪽에 있는 나는 안전하고 세련된 존재라고 믿고 싶은 욕망이다. 혐오는 늘 그 안에 자기 확인의 구조를 품고 있다.
2개월이 지났다. 연구소들이 말한 것처럼 젠지가 정말 남의 시선을 신경 안 쓰는지,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고 싶은 불안함이 가득한 세대가 아닐까. 섣불리 말하기 어렵다. 들여다보면 그들도 똑같은 것을 먹고 똑같은 것을 좋아한다. 유행을 따르고, 비교하고, 상처받는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고 쓰면서 댓글창의 밤티를 읽는다. 자기 확신의 세대라고 하지만,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흔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타자를 지운다. 경계선을 긋고, 그 안에서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게 밤티라는 단어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모두가 외면한 것들이 있다. 진짜 새로운 예술은 그 미감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야만 찾을 수 있다. 예술은 밤티한 것에서 미학을 찾는다. 아무도 보지 않으려는 곳을 굳이 쳐다보고, 아무도 만지지 않으려는 것을 어루만지는 게 예술이다. 피카소가 그렸던 건 흐르는 코, 비뚤어진 눈, 낡고 헤진 것들이었다. 세상이 구제 불능이라 선고한 것들이 미술관에 걸렸다. 진짜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밤티를 낙인으로 쓰는 사람이 아니라, 밤티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사람. 댓글창에서 선고받은 것들을 데려다가 캔버스에 올려놓는 사람.
밤티라는 단어가 인스타그램 댓글창에서 구제 불능의 선고를 내리는 동안, 어딘가의 미술관에서는 그것이 액자에 걸려 있다. 이름표도 달려 있다. 시대를 앞서간 최고의 미학이라고.
이소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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