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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이 직접 쓴 ‘K팝 로맨스’까지
K콘텐츠, 거침없는 유럽 침투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pr 26 2026 10:30 AM
독일 도서전에서 만난 K콘텐츠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갓 마치고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업체에 취직한 매니저 민서희와 K팝 아이돌 그룹 밀리언즈의 멤버 임태준의 좌충우돌 로맨스 스토리. 약간 오글거릴 수 있는 이 이야기는 지난달 20일 독일 라이프치히 국제도서전 박람회장 ‘K팝 로맨스’ 부스에서 접한 로맨스 소설 ‘밀리언즈’ 시리즈의 줄거리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독일의 초대형 도서박람회, 그중에서도 일본 망가(만화)가 점령하다시피한 판타지 코너에서 K팝을 발견하니 반가움이 앞섰다.
그러나 K팝만 보고 한국인이 썼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밀리언즈’ 시리즈의 작가는 다름 아닌 독일인 사브리나 T. 루돌프(39). K팝 그룹 슈퍼주니어 광팬으로 2011년부터 1년 6개월여간 서울에 머물렀던 경험이 이 소설을 탄생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 정확히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10년 전 한국 생활을 함께했던 여동생 안야와 친구인 사하르 아야치가 루돌프에게 K팝을 소재로 로맨스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지난달 20일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 마련된 'K팝 로맨스 코너' 부스에서 사브리나 T. 루돌프(가운데 노란색 상의)가 현지 독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라이프치히=정승임 특파원
이들은 곧바로 ‘인비전 퍼블리싱’(InVision Publishing)이라는 출판사를 차렸고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투자금을 마련, 밀리언즈 시리즈의 첫 작품인 ‘밀리언 비기닝즈’를 출간했다. 지극히 한국적인 주인공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작명에도 공을 들였다. 루돌프는 “개인적인 추억과 익숙함, 그리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소리가 중요한 기준이 됐다”며 “일례로 주인공 태준은 한자 이름(太俊)에서 알 수 있듯 '위대하고 뛰어나다'는 뜻이 담겼다”고 말했다.
2023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시작으로 독일의 각종 도서전에서 책을 소개하며 현지 독자들을 만나고 있는 루돌프는 영어권 독자들과도 소통하기 위해 최근 영문판까지 냈다. 올해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선 K팝 로맨스 소설 독자들과 직접 만나는 낭독회까지 열었다.
금발에서 흑발로… 주인공이 바뀌었다
지난달 20일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 마련된 'K팝 로맨스 코너' 부스. 모두 한국인이 아닌 독일어권 작가들이 쓴 작품이다. 라이프치히=정승임 특파원
한때 순정만화나 로맨스 소설에 빠졌던 독자라면 독일어권 작가들이 동양인인 K팝 스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실 자체가 격세지감일 것이다. 동양인 작가가 썼는데도 서양인을 주인공으로, 또 유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워낙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영국 국적의 세계적 배우 라이더 베이와 한국인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인 엘리지(지영재)의 러브 스토리를 다룬 원수연 작가의 대표 히트작 ‘풀하우스’가 대표적이다. 일본인 작가가 쓴 ‘베르사유의 장미’, ‘캔디캔디’도 마찬가지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유럽 귀족 또는 상류층을 내세운, 서양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소설은 하나의 장르이자 흥행 공식이었다. 여기엔 서양인에 대한 동경이 내심 담겨있다.
그런데 문화 역전현상이라고 느낄 정도로 K팝 스타가 유럽 한복판에서 글로벌 로맨스의 간판이 된 것이다. 유럽 귀족이 도맡았던 남성 주인공은 검은 머리 K팝 스타로, 로맨스 장소 역시 으리으리한 유럽 궁전에서 K팝 무대로 이동했다. K팝이 단순한 문화 소비 대상을 넘어 서양인들의 작품 세계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현지에선 동양인 K팝 스타가 선망의 대상으로 그려졌다는 것 자체를 한국과 K팝의 달라진 위상을 반영하는 증거로 보고 있다.
루돌프는 “독일에도 로맨스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층이 충분히 존재하고 많은 이들에게 K팝 로맨스라는 개념 자체가 신선해서 더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며 “독일 가게에서 스트레이 키즈나 세븐틴의 음악을 쉽게 들을 정도로 독일에서 K팝의 인기는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급성장했다”고 말했다.
한국인 성 ‘Park’으로 필명까지 지었다
지난달 20일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 마련된 'K팝 로맨스' 부스에서 샐리나 슐라거(필명 샐리 박)가 자신의 작품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라이프치히=정승임 특파원
이날 도서전에서 접한 또 다른 K팝 로맨스 소설 ‘Be my hope’(내게 희망이 되어줘)는 작품 자체보다 저자 이름인 샐리 박(Selly Park)에 더 눈길이 갔다. 한국계 혼혈인인가 했는데 토종 오스트리아 출신인 샐리나 슐라거(31)의 필명이었다. 그는 “K팝 소설인 만큼 더 주목받을 것 같아 일부러 한국인 성으로 필명을 지었다”며 “박(Park)은 부드럽지만 강한 느낌이 나고 내 이름과도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이 소설은 비극적인 사고로 희망을 잃어버린 오스트리아 여성 미나(Meena)가 자신을 되찾기 위해 서울로 떠나고 그곳에서 K팝 그룹 섹터파이브(Sector5)의 멤버 남준을 만나 꿈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주인공 이름에서 짐작 가능하듯, 그는 K팝 그룹 BTS(방탄소년단)의 리더 RM(본명 김남준)의 팬이다. 슐라거는 “오스트리아는 작은 나라인데다 팬 커뮤니티도 지리적으로 흩어져 있지만 K팝은 단순 취미를 넘어 여러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있다”며 “최근 몇 년간 K팝의 성장세는 놀랍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일본 망가가 독보적인 이유
지난달 20일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코스프레 복장을 하고 입장한 독일인들. 모두 일본 망가 팬 축제인 '망가 콘'을 찾은 이들이다. 라이프치히=정승임 특파원
물론 ‘K팝 로맨스’가 아직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단계는 아니어서 얼마나 성장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독일 특히 유럽 출판 시장에서 아시아 콘텐츠하면 일본 망가로 통하는 것도 현실이다. 실제 이날 라이프치히 도서전 행사장 입구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코스프레 복장을 한 독일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도서전과 동시에 열리는 또 다른 페스티벌인 ‘망가 콘’(Manga con)을 찾은 이들이었다. 2014년부터 시작된 망가 팬을 위한 대형 행사로, 매년 수만 명이 찾는데 티켓이 조기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폭발적이다. 올해 라이프치히 도서전(2026년 3월 19~22일) 방문객이 역대 최다인 31만3,000명을 기록한 데에도 이들의 역할이 컸다. 이에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매년 일본 망가에 더 많은 부스와 공간을 내주고 있다.
지난해 독일의 망가 시장 규모는 약 7억6,500만 달러(약 1조1,319억 원), 매년 1,500개 이상의 신간이 출간된다. 독일 그리고 유럽에서 망가가 독보적 위치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올해 베를린 독립만화 축제(Comic Invasion Berlin 2026)에서 한국의 주빈국 프로그램 총괄을 맡은 김빛나래 기획자는 한국일보에 “유럽에서 일본 망가의 경쟁력은 소재와 장르의 다양성에 있다”며 “다양한 연령층과 취향을 포괄할 수 있는 구조가 잘 갖춰진 점이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유럽의 최대 망가 시장인 프랑스(시장 규모 12억9,500만 달러)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김 기획자는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만화를 하나의 문화예술 장르로 인정해왔다”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망가가 활발히 유통된 흐름이 독일을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로 자연스럽게 확산됐다”고 덧붙였다.
"망가 아닌 만화" 한국 만화의 맹추격
지난달 23일 독일 베를린 시내 서점에 전시된 BTS 관련 출판물들. 뒤에는 일본 망가 코너. 베를린=정승임 특파원
최근엔 K팝 열기에 힘입어 독일에서 한국 만화의 추격도 시작됐다. 스시가 아닌 김밥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일본 망가 아닌 한국의 ‘만화’가 있다고 적극 홍보 중이다. 실제 일부 출판사에서는 망가(Manga)가 아닌 만화(Manhwa)로 표기하며 별도 장르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달 11일 개막한 베를린 독립만화 축제(5월 10일까지)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선정된 것도 고무적이다. 주독일한국문화원 등은 이번 행사가 ‘틀에 갇히지 않은 프레임: 만화가 베를린으로 간다’(Frames Unbound: Manhwa goes Berlin)를 주제로 열리는 만큼, 한국 만화와 그 다양성을 확실히 알릴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 기획자는 “한국이 주빈국으로 선정됐다는 것은 올해 페스티벌에 한국 만화가 주로 초대되고 집중적으로 조명받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콩글리시 ‘웹툰’으로 승부수
지난달 20일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 현장. 라이프치히=정승임 특파원
한국 만화의 주요 무기는 ‘웹툰(Webtoon)’이다. 가로가 아닌 세로 방향으로 넘기는 웹툰 플랫폼을 한국이 처음 개발한 만큼 이 기술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다. 콩글리시인 웹툰도 고유명사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주독일한국문화원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 웹툰이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콩글리시로, 영어로는 보통 웹코믹(Webcomic)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자체 개발한 플랫폼인 만큼 웹툰을 아예 고유명사화하려는 게 우리의 전략”이라며 “일본 망가가 종이책을 기반으로 했다면 플랫폼 최강자인 우리는 웹툰으로 승부를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에서 인기를 얻은 웹툰 ‘나 혼자만의 레벨업’은 대표 성공작이다. 압도적인 액션 연출 외에도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세로 스크롤 △속도감 있는 컷 전환 △영상미 등 웹툰의 고유 특성이 유럽 젊은 층을 공략하는 데 주효했다는 평가다.
김 기획자는 “웹툰은 모바일 환경에 최적화된 세로 스크롤 형식을 기반으로 기존의 출판 만화와는 다른 읽기 경험을 제공한다”며 “일부 작품에서 음향과 간단한 애니메이션 요소가 결합되면서 디지털 콘텐츠로서 확장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라이프치히=글·사진 정승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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