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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이전 3000년 아우른 ‘최신 인문학’

구약 신학 배경 찾아 시간 여행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May 09 2026 09:34 AM


한국 언론 최초로 고대근동학 연재를 시작한다. 이 학문은 인류 최초의 문명을 연구하는 가장 최신의 인문학이다. 한국의 대학과 지성에는 문맹과 같은 영역이다. 인류 최초의 역사적 흐름을 드러낼 이 연재로 말미암아 기이한 참서나 관광 가이드 수준의 지식이 횡행하는 현실을 깨닫게 되길 희망한다. 아울러 현대적 구약 신학의 배경을 음미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19세기 들어서야 학문 꼴 갖춘 고대근동사

고대 근동 문명은 역사시대가 시작하는 기원전 35세기경의 슈메르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헬레니즘을 퍼뜨린 기원전 4세기까지, 대략 3,000년의 시간을 아우른다. 지리적으로는 서쪽으로 나일강의 이집트에, 동쪽으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이른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고대 근동 세계의 양대 중심 지역이고, 그 밖에 시리아-팔레스티나, 소아시아, 지중해, 시나이반도 등의 하위 지역이 존재한다.

 

9d81047f-983b-4c94-81fb-3575998c4abd.jpg베히스툰 비문은 다리우스 대왕이 고페르시아어, 엘람어, 아카드어로 새긴 다국어 비문이다. 이란 케르만샤에 있는 100m 높이의 석회암 암벽에 가로 15m 세로 25m 크기의 그림과 본문이 전해진다. 18세기부터 이 본문의 해독을 위해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지만, 19세기 중반기에 가서야 해독되었다. 주경미 교수 제공

 

최고(最古)의 문명을 연구하는 분야가 어떻게 최신(最新)의 인문학이 되었을까. 최초의 문자인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와 고대 이집트의 성각문자는 인류가 완전히 망각했다가 19세기에 새롭게 해독한 언어들이다. 프랑스의 천재적 언어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1822년 성각문자를 해독했다. 쐐기문자의 경우 독일의 금석문 전문가이자 언어학자인 게오르크 F. 그로테펜트가 일부 해독한 베히스툰 비문을 영국의 고대근동학자이자 관리였던 헨리 롤린슨경이 완전히 해독한 해가 1847년이다. 천재들의 협업과 비상한 노력으로 문자가 이해되자 고대 이집트를 연구하는 이집트학과 고대 메소포타미아를 연구하는 아시리아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이전에도 우연히 발견한 거대한 무덤과 신비한 고대 도시가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실체를 증명할 수 없었다. 누구의 무덤이고 어떤 도시였고 어떤 민족이 어떤 신을 믿으며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세계를 이해했는지는 짐작만 할 수 있었다. 오로지 글자를 해독하면서 증거가 확실해졌고, 고대의 기록을 체계적으로 점검하여 고대 근동 문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야 학문다운 모습을 갖춘 인문학이 몇이나 될까. 고대근동학이 그렇게 도약하였다.

 


방대한 문헌 남긴 고대 근동 세계
 

f1ff9434-3c1c-4a6e-a4e2-5ac5b335c7ce.png고대근동학이 다루는 지역은 현대의 중동지역과 북아프리카에 이르고, 일부 유럽(그리스), 지중해, 이란, 일부 중앙아시아를 포함한다. 바다, 강, 사막, 고원, 평원, 산맥 등 거의 모든 자연환경을 볼 수 있고,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명멸했다. 이 가운데 나일 강 유역의 고대 이집트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주변의 고대 메소포타미아가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지도상에 포함된 모든 지역을 아우르는 개념어로 '고대근동 세계'를 사용할 수 있다. 주원준 제공

 

이 문헌들을 통해 거대한 세상이 드러났다. 그래서 19세기 이후의 우리는 그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고대근동인을 더욱 생생하게 알 수 있다. 고대 근동 세계에는 다양한 민족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이 물을 갈라서 창조되었다는 시원의 설명과 태초의 홍수 이야기를 공유했고, 인간은 신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삶의 도리를 나누었다. 물론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냉혹했다. 자연에 맞서 생존해야 했으며, 끝없이 경쟁하는 가운데 제도와 기술이 발전했다. 크고 작은 나라들이 복잡하게 얽혔다. 서로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수천 년의 시간과 망각을 뚫고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고대 근동 문헌의 분량은 얼마나 될까. 독일 라이프치히대 미하엘 P. 슈트레크 교수의 치밀한 연구에 따르면 현존하는 아카드어 문헌의 분량(약 990만 단어)은 라틴어로 전하는 문헌의 분량(약 1,000만 단어)과 비슷한 수준이다. 아카드어에 앞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쓰였고 역시 쐐기문자로 표기된 슈메르어의 문헌 분량(300만 단어)은 고대 이집트어 문헌과 엇비슷하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본문이 대략 30만 단어라고 하니, 현재 슈메르어 문헌과 이집트어 문헌은 구약성경의 10배 분량이고, 아카드어 문헌은 다시 그 분량의 세 곱이 조금 넘는다. 고대에 생산된 문헌이 아니라 현재 전하는 문헌이 이만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은 이런 초보적인 문헌을 이해하고 번역할 가장 기초적 준비도 갖추지 못했다. 일본은 이미 탄탄한 실력을 뽐내고 있고, 중국은 국가 주도의 엄청난 물량 공세를 쏟아붓고 있다고 들었다. 한국의 지성과 대학은 언제나 잠에서 깰까.

 


종교와 함께한 고대근동학의 태동
 

8eb533b8-b7b9-4392-9896-baa9a2a9ba9d.jpg시리아 지역 항구도시인 우가리트에서 발견된 높이 142cm의 바알 부조 비문. 구약성경도 고대 근동 문헌이기에, 구약성경 본문에서 고대 근동 세계의 요소들을 발견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고대근동학은 바알 등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신들에 대해서도 훨씬 구체적인 정보를 전해준다. 주원준 제공

 

고대근동학은 출발부터 성경을 향한 종교적 열의와 함께했다. 영국의 아시리아학자 조지 A. 스미스나 이집트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윌리엄 M. F. 피트리경처럼 초창기의 고대근동학은 성서학과 긴밀했다. 당시는 성경의 시각으로 유물을 해석했다. 하지만 성경이 전하는 역사적 정보를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은 점차 분명해졌다. 급기야 1902년 독일의 아시리아학자 프리드리히 델리치의 연설이 일으킨 바벨-비벨 논쟁(Babel-Bibel-Streit)은 그리스도교 세계를 뒤흔들었다. 구약성경은 바빌론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만, 실상 바빌론이 문화적으로 이스라엘을 압도했다는 그의 통찰은 격렬한 논쟁을 낳기에 충분했다.

델리치의 연설보다 한 해 빠른 1901년에는 프랑스인들이 수사에서 함무라피 법전(Codex Hammurapi)을 발견했다. 높이 2.25m의 현무암 석비에 새겨진 법률 본문은 기원전 18세기에 바빌론에서 작성된 진본이었고, 구약성경의 율법보다 최소 수백 년은 너끈히 앞서는 것이었다. 이후 구약성경의 율법과 함무라피 법전과의 비교 연구는 이제 기본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급격히 변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 2,000년을 생각하면 극히 최근의 일이다. 19세기 이전의 어떤 성서학자도 ‘함무라피’라는 단어 자체를 몰랐다. 18세기 이전의 어떤 구약학자도 아카드어, 슈메르어, 이집트어, 히타이트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는 구약성경 연구를 위해 이런 지식들을 피해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새로운 유물 발굴과 본문 해독은 20세기 들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의 실체와 그들이 남긴 문헌인 구약성경의 이해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20, 1930년대를 지나며 구약학에는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회 안팎에선 이와 거리를 두려는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적지 않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새로운 흐름을 껄끄럽게 느꼈고, 일부 학자들은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개신교 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연구는 꾸준히 발전했다. 가톨릭교회는 비오 12세가 1943년 교황 칙령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을 발표하며 연구의 물꼬를 틔워주었다.

이제 이스라엘이 고대 근동 세계의 작은 나라였고 지정학적 요충지의 후발주자였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구약성경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탄생하고 전승된 문헌이기에 고대 근동의 다른 문헌들과 병행하는 요소도 풍부하다. 앞서 보았듯이 분량만 따지자면, 고대 이스라엘이 남긴 구약성경은 다른 고대 근동 문헌에 압도된다. 이런 풍부한 자료를 무시하고 구약학을 하기는 불가능하다.

 


한국 대학선 미개척 학문과 다름없어… 신선한 자극제 되길
 

01b1e577-d6b9-428b-80d6-664d6650d5a2.png1939년 영국의 고고학자인 레너드 울리경은 현대 시리아에 위치한 고대 도시 알랄라흐를 발굴하다 이 좌상을 발견했다. 목이 부러진 채 땅속에 처박힌 신상은 비교적 흔히 발굴된다. 고대 근동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다. 이민족이 쳐들어와서 신전의 가장 중심부에 모신 신상의 목을 부러뜨리고 땅에 파묻는 것은 그 도시를 다스리는 신을 죽여버리는 일이요, 승리를 확정 짓는 결정적 행동이었다. 이렇게 출토된 좌상은 기원전 12세기의 바다 민족의 침입으로 알랄라흐가 멸망했다는 결정적 근거일 것이다. 이드리미 임금의 일대기가 좌상의 어깨와 앞치마 등에 적혀 있어,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지역적 특색이 강한 아카드어로 적혀있는 이 본문에서 이드리미는 여성들과 아이들을 이끌고 광야로 탈출하여 부랑자들의 무리인 하피루를 규합했고, 결국 왕권을 회복했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적어 놓았다. ⓒThe Illustrated London News

 

고대근동학은 인류 보편의 학문이다. 고대사가 우리 민족의 자존심에 봉사해야 한다는 편협한 자의식으로는 이 학문에 접근할 수 없다. 인류 보편의 역사를 연구하는 일에 기쁘게 참여하고 헌신하지 않는 나라나 교회가 세계적 인정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대학에는 고대근동학과도 존재하지 않고, 사실상 전공 교수도 없다. 가장 오래된 세계를 다루는 최신의 인문학은 한국에 지적 공백 또는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 한국 인문학이 생산하는 수많은 지적 담론이 '근본 본문의 부재'라는 상태를 해결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이 연재는 한국고대근동학회(KANES)의 학술 이사들이 각자의 전공을 살려 나누어 집필한다. '함무라비'가 아닌 '함무라피', '수메르'가 아닌 '슈메르'처럼 일부 용어와 정보는 그간 통용되던 것과 차이가 날 수 있으니 너그러운 이해를 청한다. 지면을 내어주신 한국일보에 감사드린다.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겸 한국고대근동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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