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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성
박엘리야(문인협회)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May 21 2026 11:21 AM
수필이 있는 뜨락(38)
이 건물 21층이라던데 몇 호랬더라. 나는 V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받아 가던 중이었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V의 아파트는 높게 솟은 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복도에서부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와서 몇 호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문을 여니 일찌감치 도착한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신발을 벗어 둘 공간마저 부족했다. 챙겨온 과자를 V에게 건네주고 분주한 그와 잠시 인사를 나눴다.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본 적 없는 얼굴들과 몇몇의 익숙한 얼굴들이 이 방 저 방을 메우고 있었다. 빨간 플라스틱 술잔을 한 손에 들고 얼마 남지 않은 공간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고 식사를 시작하자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공기 위로 누군가가 던진 농담이 머리 위를 떠다녔고, 이에 메아리처럼 얕은 웃음소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나도 따라 웃었다. 과자가 든 접시를 손에 든 채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동의하지도 않는 것에 대해 농담으로 받아치고 별로 관심도 없는 소재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다수의 사람과 있을 때 꺼내야 할 주제를 이야기하고 그들에게서 예상했던 반응을 보고 안심했다. 마치 그런 대화들이 그 사회에서 쓰이는 고유한 신호라도 되는 양 능숙하게 행동했다. 나는 내 자신이 아닌 것을 행하는 데에 도가 튼 것 같았고 이런 자신이 거의 뿌듯하기까지 했다.
Chat GPT 생성 이미지
노랫소리가 흥겨워지고 방도 후덥지근해졌다. 나는 여러 켤레의 양말과 웃음소리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좌변기에 앉자, 술 기운에 고개가 절로 숙어졌다. 바닥에 어둠의 형체가 드리워 있었다. 그림자였다. 그 날따라 그림자가 나 자신과는 별개의 것인 듯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형체가 흔들리며 작아졌다. 그 흔들림으로 그림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너 여기서 뭐 하니. 어떠한 언어도 아닌 말로 나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왜 여기에 있지.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나를 의문 속에 남겨두고 그림자는 다시 침묵했다.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밤공기가 차가웠다. 금요일을 신나게 즐기고 있는 한 무리가 왁자지껄 버스 정류장 앞을 지나쳐 가자, 술 냄새가 흐릿하게 풍겨 왔다.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소란한 어둠을 바라보았다. 분명 많이 웃고 많이 말하고 많이 먹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허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창을 켰다가 끄기를 반복했다. 즐겨 듣던 노래를 틀어 보았지만 끝까지 듣지를 못했다. 분명 기분이 한껏 고양된 것 같은데, 파티가 재밌었던 것 같은데, 모두 즐거웠던 것 같은데. 연락하지 않을 연락처가 늘어나고 궁금하지도 않은 팔로잉이 늘어나고 있었다. 내 핸드폰은 만나면 만날 수록 외로운 관계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뒤죽박죽 섞여버린 친밀감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한 정거장 일찍 버스에서 내렸다.
사람 관계란 진심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나의 진심은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엄지발톱 같아서 자꾸만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나에게 있어 정말로 중요한 질문들은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못한 채 내 안에서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대답을 잃고 질문을 잃고 이제는 내 이름마저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종국에는 원치 않는 것만 잔뜩 갖게 될까봐 겁이 났다. 분장을 지우는 법을 까먹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분장을 지운 내 얼굴 위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어 보니 룸메이트는 이미 잠이 든 것 같았다. 룸메이트와 나는 신발의 유무로 서로의 부재를 확인하는 사이였다.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복잡한 침대 위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 위에 누웠다. 술기운 탓인지 머리도 어지럽고 발바닥은 욱신거렸다.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밤늦게 잠은 오지 않았다. 내가 아직 나로 돌아오는 중인가 보았다. 눈을 감고 몸을 뒤척이자, 침대도 함께 뒤척였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내 영혼은 인간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익숙한 목소리를,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듣고 싶었다. 핸드폰을 들어 연락처를 쓸어 내렸지만 아무에게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 사실 못했다가 맞는지도 모른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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