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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와 조롱을 먹고 링 위에 또 올라가기

그것이 황동만을 구원했다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Jun 14 2026 01:39 PM

드라마 ‘모자무싸’의 황동만


배 아파지기 쉬운 세상이다. 우리는 매일 타인의 성취를 강제로 목격하며 살아간다. “선생님은 삼성전자나 하이닉스 주식 좀 가지고 계시죠? 다들 크게 돈 벌었다고 하는데… 제 얘기는 아니니 속이 쓰리네요.” 요즘 진료실에서 종종 듣는 이런 이야기 앞에서 티를 내지 않지만, 나 역시도 배가 아프다. 아마도 전국 여기저기에서 사촌의 주식 소식에 복통이 발생한 환자들이 급증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수많은 복통 환자를 대변하듯, 최근 종영한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는 타인의 성취에 누구보다 크게 배 아파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황동만은 대학 영화 동아리 선후배 모임인 8인회 중 유일하게 데뷔를 못한 채 20년째 감독의 꿈에 매달려 있다. 남들이 영화사 대표, 감독, PD 등으로 자리 잡고 성장하는 동안 그는 실패만 반복한다. 감내하기 힘든 이 격차 앞에서 배가 너무 아팠던 그는 타인들을 매우 적극적으로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마음을 지키려 했다.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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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주인공 황동만(구교환). 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제공

 

왜 타인의 성취를 있는 그대로 응원하지 못하고 고통을 느끼기까지 할까? 질투심을 반영하는 속담들은 타 문화권에도 여럿 있지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처럼 신체적 통증으로까지 이어지는 속담을 가진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여러 이유가 얽혀 있기에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강력한 집단주의 속에서 ‘분리된 개인’이 아닌 ‘상호의존적 자아’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는 소속 집단 내 관계와 서열 속에서 정의된다. 나를 정의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나의 내면적 가치가 아니라 ‘집단이 중요시하는 가치’에 있다 보니 주변인의 성공은 곧 상대적인 나의 가치 하락으로 직결된다. ‘그건 그저 그 사람의 성공일 뿐’이라며 분리해서 타자화해야 타격이 적은데, 상호의존적 자아들은 이 분리에 실패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에 대한 조사(2021년 퓨리서치센터)에서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를 1위로 꼽은 국가다. (17개국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14개국은 ‘가족’을 1순위로, 그 외 두 나라는 ‘건강’과 ‘사회’를 선택했다.) 물질이라는 단일한 잣대로 서로를 비교하는 사회에서 타인들의 주식, 부동산, 자동차, 명품백… 그 모든 것이 나의 도태를 의미하는 날카로운 칼날이 된다.

게다가 현대 사회는 정보의 과잉으로 인해 하루 종일 나만 뒤처진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이제 사람들은 단순히 상대적 가치 하락을 넘어, 존재 자체의 ‘무가치함’까지 느낀다. 이 지독한 좌절감은 종종 타인을 향한 분노와 혐오로 변질된다. 선배가 연출한 영화에 끝없는 악플을 달던 황동만처럼, 부러운 상대를 공격하는 심리가 사회 곳곳에서 자라나고 있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대기업들의 성과급 소식에 배 아파하는 것을 넘어, 사촌의 땅을 빼앗아 나누자는 의견들까지 나오고 있다.

사라져가는 존재감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리는 동만의 모습은, 무가치함의 공포에 쫓기는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자꾸 남들과 비교당하며 너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라는 압박에 어린 시절부터 쫓기는 이 사회에서는 열등감 콤플렉스가 자라나기 쉽다. 세상을 우월과 열등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월하지 못한 평범함은 열등으로 여겨진다. 그저 평범해지는 당연한 상황 속에 극심한 수치심을 느끼며 자신의 무가치함에 괴로워하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성적 하락 후 학교 자체를 떠나버린 학생, 명문대를 졸업했음에도 일하지 않는 청년 등 자신의 무가치함에 엄청나게 괴로워하고 자책하면서도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이들을 진료실에서 만난다. 남들이 볼 땐 좋은 학교와 좋은 회사를 멀쩡하게 잘 다니면서도 더 능력 있는 이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무가치함에 불안해하는 이들은 훨씬 더 많이 만난다. 그야말로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실패는 열등함이 아닌 평범함
 

21afe2ca-7a0f-4657-8275-b2773ad873d4.png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동만(구교환)이 영화감독으로 성공한 '8인회' 멤버 박경세(오정세)와 말싸움을 벌이고 있다. 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제공

 

초반 내내 시기와 질투로 미쳐버린 인간의 밑바닥을 집요하게 보여주던 드라마는, 이후 동만의 진정한 평화 찾기 과정을 따라간다. 2화 말미에 “난 내 무가치함의 끝에서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릴 거야. 나의 빛나는 스토리를 기대해라”라던 외침처럼, 나는 큰 기대를 가지고 드라마의 끝까지 따라갔다. 무가치함을 극복할 단서들이 숨어있길 바라며. 그리고 내가 그 안에서 건져 올린 두 가지 단서를 이번 글에 남겨보려 한다.

첫째는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계속해서 ‘링 위에 올라가는 삶의 자세’다. "안 창피하냐? 사람들이 박경세 영화 욕하는 거" 동만이 선배의 영화를 조롱하며 묻자, 경세의 아내이자 제작사 대표인 고혜진은 이렇게 답한다. "나, 박경세 존경해. 박경세는 또 써, 또 만들어. 그 조롱을 먹고 또 해. 며칠 펑펑 울어, 눈물 콧물 질질 짜가며 울어. 그리고 또 링 위에 올라가. 또 들입다 처맞아. 언젠가 나도 제대로 싸워 이겨보겠지, 들입다 처맞고 또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사람들이 영화만 보는 줄 알지? 그런 기운도 알아봐. '우와, 끝까지 가려고 하는구나.' 너? 끝까지 안 가.”

세상은 혹독하다. 요즘 세상이 문제라고? 아니다. 인류 역사상 세상이 살아남기 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애당초 뜻대로 되는 것보다 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게 인생이다. 타인의 비난, 거절, 탈락과 실패는 열등함이 드러나는 순간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내야 하는 보편적 일상의 순간들이다. 그럼에도 지나친 수치심과 좌절감을 느끼며 계속 도전을 피한다면, 스스로에 대한 과도하고 비현실적인 내현적 자기애가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대단히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 그렇다는 것을, 평범이 나쁜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받아들여야 한다. 실패와 좌절을 당연히 여기며 묵묵히 다시 링 위로 올라갈 때, 그렇게 각자가 바라는 삶을 향해 걸어 나갈 때 비로소 무가치함의 늪에서 한발 빠져나올 수 있다.
 


유대로 완성되는 평화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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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은아(고윤정)가 동만(구교환)을 위로하듯 꽉 끌어안고 있다. 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제공

 

둘째, ‘유대와 연결’이다. ‘손절’의 기준들이 끝없이 소개되는 요즘 세상에서 참 진부한 말들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잠시만 달리 생각해보자. 과연 나 자신은 수없이 많은 손절의 기준들을 다 뚫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인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 믿기 쉬운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보통 드라마 속 인물들 역학 관계도 그렇게 그려지는데, 이 ‘모자무싸’는 다르다. 모든 인물이 하나같이 지질하고 별로이다. 그런데 회차가 진행될수록 그들 모두 동시에 정감이 가기도 한다. 이는 드라마니까 가능한 다소 무리한 설정으로 볼 수도 있다만, 나는 실제 세상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 별로고 나쁜 타인들 가운데 나만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이유는 자신의 서사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인의 서사에 대해서도 충분히 잘 알게 되면 그 역시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 된다. 내가 ‘사람은 다 별로’라는 말을 진료실에서 자주 하면서도, 그곳에서 만나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모두에게 정감이 가는 이유다.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잘못하는 순간들도 많겠지만, 저절로 그의 삶을 응원하게 된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인정해주는 타인과의 연대가 있을 때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황동만에게 변은아가, 박경세에게 고혜진과 보조작가가 있었듯 말이다. 가혹한 세상 속에서 혼자의 힘으로 일어서기엔 우리 모두 다 나약하니까. 서로 도움을 구하고 링 위로 다시 올라가기를 격려하는 유대가 절실하다. 링을 벗어나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으니까.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이 드라마를 추천하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우리들 마음속 내현적 자기애를 비춰주며 거울 치료해주는 부분들은 반갑고 좋았지만, 마지막까지 본 분들이 ‘역시 무가치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성공밖에 없다’고 여길까 내심 걱정되기도 했다. 현실의 우리 대다수에겐 동만과 은아 같은 특별한 재능이 없으니까. 하지만 진정 기억해야 할 것은, 동만의 삶을 특별하게 구원한 것은 마지막의 성과가 아니라 그가 버텨낸 ‘삶의 맥락’이라는 점이다. 20년간 알바를 병행하며 14개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 링 위에 못 오른다며 모두가 비웃을 때에도 그는 링에 오르기 위한 도전을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 열정의 서사가 있었기에 도우려는 사람들이 곁에 모였고, 연대의 힘이 성과로 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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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동만(구교환)은 결국 오랜 기간 준비해온 시나리오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로 영화감독에 데뷔한다. 나무액터스 제공

 

꼭 기억했으면 한다. 평범함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평범함을 열등함으로 바라보고 타인과 끝없는 비교를 이어갈 때 우리 영혼은 무가치함에 서서히 침식된다. 평범함을 인정하자. 그리고 그 위에 자신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자. 그렇게 과거의 나와 비교하며 발전할 때 비로소 삶에 특별함을 추가할 수 있다. 무가치함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김지용 연세웰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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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koreatimes.net/주간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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