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조력사망과 고독사...
무엇이 더 생명을 경시하는 걸까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ug 02 2026 02:17 PM
조력사망에 “생명 경시” 비난하며 돌봄 소외된 고독사 현실엔 침묵 ‘생명 유지’보다는 ‘삶’을 존중해야
지난 15일 프랑스 하원에서 조력사망 합법화 법안이 통과되었다. 진행성 또는 말기 단계의 치명적인 불치병을 앓고 있는 성인만 해당하며, 환자 본인이 자유롭고 명확하게 의사를 밝혀야 한다. 또한 언제든지 결정을 철회할 수 있다. 헌법위원회의 최종 심사를 남겨두고, 종교계와 일부 의료계는 반대하고 있다. 사회적 취약계층을 압박할 수 있고, 생명 경시 풍조가 확산될 수 있다는 이유다. 이는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조력사망 논의의 핵심은 어떤 안전장치를 마련하느냐다. 다만 조력사망을 곧 생명 경시로 보는 주장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올해 4월 루게릭 환자가 스위스 디그니타스로 가는 길에 동행했다. 5월 초 우편으로 유해를 받은 뒤 열린 장례식에는 고인의 가족과 친지, 친구들이 모여 편지를 낭독하고 고인이 애창하던 노래를 불렀다. 아름다운 장례식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고인의 남편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생전에 가까웠던 한 친구가 조력사망을 ‘생명 경시’라고 했다는 것이다. 장례식에서 몹시 애통해하던 모습을 봤던 터라, 남편의 상심은 더 컸을 것이다.
그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2023년 여름으로 돌아갔다. 엄마도 스위스에서 삶을 마감했다. 이모는 “엄마가 1, 2년은 더 살 수 있는데, 엄마하고 네가 죽이 맞아 그런 결정을 했다”라며 나를 책망했다. 엄마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본 건 아빠와 나였다. 담당 의사가 말한 여명은 두 달 남짓이었다.
한 사람의 선택을 평가하기 전에, 우리는 그가 견딘 삶과 고통을 충분히 들여다보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생명을 존중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만들어온 세상은 실제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엄마가 떠난 다음 해 1월, 큰외삼촌이 요양원에서 생을 마쳤다. 주민센터에서 유골함을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고서야 이모들은 그의 죽음을 알았다. 그는 행정적으로 무연고자였다. 가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연락이 끊겨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 스위스에 가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가족들에게 연락하던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나는 잠시 그를 떠올렸다. 껄껄 웃는 소리, 흰 양복에 검은 와이셔츠, 금색 용머리가 달린 지팡이.
큰외삼촌의 죽음을 두고 생명 경시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쩌다 홀로 죽게 되었는지 묻는 목소리도 없다. 스스로 마지막을 결정한 이들에게는 생명을 가볍게 여겼다고 비난하면서도, 돌봄과 관계에서 밀려난 사람이 고립되어 죽어가는 현실에는 침묵한다.
생명 경시와 생명 존중. 그 둘 사이의 깊은 간극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생명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상태를 말한다. 반면 삶이란 한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 관계와 경험, 고통과 선택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종종 생명을 존중한다는 말을, 신체 기능을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 이해가 어디에 도달하는지 나는 여러 번 보고 들었다. 중환자실, 몸에 꽂힌 관들, 기계가 대신 쉬어주는 숨, 회복 가능성이 없다는 의료적 판단 뒤에도 견뎌야 하는 시간.
한쪽에서는 누구도 돌보지 않아 홀로 죽고, 한쪽에서는 놓아주지 못해 끝나지 못한다. 방치와 과잉은 반대편에 있는 것 같지만 뿌리는 같다. ‘삶’을 들어낸 자리에 ‘생명’의 시간만 맴돌 때 벌어지는 일이다. 삶을 지탱하는 것은 호흡만이 아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일이 삶을 존중하는 일까지 이르지 못하면, 그 존중은 절반에 머문다.
엄마의 이야기를 에세이로 써낸 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연락이 이어졌다. 내가 만난 환자들은 조력사망을 결심하기까지 오래 망설이고 고민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이었다.
조력사망을 반대하는 쪽은 먼저 돌봄이 갖춰져야 한다고 말한다. 찬성하는 쪽은 충분한 돌봄 이후에도 남는 고통과 자기결정을 이야기한다. 입장은 다르지만, 누구도 돌봄의 부재가 죽음을 강요하는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 삶이 끝나는 방식에 매몰돼 그 삶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외면할 때, 생명 존중은 구호로만 남는다. 어쩌면 우리는 생명을 존중한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이 아닌가.
남유하 작가
www.koreatimes.net/오피니언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