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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 대단함 몰라줘”가 번아웃의 시작

인정 욕구 덜어내면 버틸 힘 생겨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ug 15 2026 02:54 PM

일의 성의·동기는 사람마다 제각각 어긋난 기대가 쌓이면 ‘번아웃’ 돼 가장 헌신적인 사람이 먼저 쓰러져


지친 얼굴의 40대 중반 간호사가 진료실에 앉았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을 스무 해 가까이 지켜온 분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꺼낸 말에는 자부심과 원망이 함께 묻어 있었다.

"선생님, 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의욕이 없고 자꾸 무너질까요."

헌신적이었고, 누구보다 사명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명감이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보호자가 고맙다는 말 없이 돌아설 때, 동료가 수고를 몰라줄 때, 환자가 짜증을 낼 때마다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이렇게 숭고한 일을 하는 나를, 어떻게 저렇게 대할 수 있지?" 그 물음이 쌓이고 쌓여 번아웃이 된 듯했다.
 


"내 일의 대단함 몰라줘" 번아웃, 과도한 기대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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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지원 기자

 

번아웃을 호소하는 분들에게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자기 일을 지나치게 대단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간호사는 헌신과 숭고함으로, 승무원은 세련됨과 매너로, 공무원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봉사로 스스로를 무장한다. 의사도 다르지 않다. 참전용사만큼은 아니어도 희생적인 봉사를 하고 있으니 응당 존중받아야 한다고 은근히 믿는다. 나도 그렇다. 가운을 걸치고 있는 동안에는 내 일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귀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진료실 문을 나서서 환자나 손님의 입장이 되는 순간, 정반대가 된다. 저 변호사가, 저 공무원이, 저 식당 주인이 하는 일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란 결국 제가 하는 일이 제일이라 믿는 존재인 모양이다.

문제는 여기서 싹튼다. 내가 내 일을 대단하게 여기는 만큼 상대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리라 기대하지만, 그들은 그만큼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일이 가장 대단하기 때문이다. 선배는 후배의 일을 이미 해본 터라 대수롭지 않게 보고, 손님은 내 일의 숭고함보다 적절한 서비스를 더 바란다. 내가 애쓴 만큼 동료도 애쓸 거라 여기지만, 일에 대한 성의와 동기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기대는 매번 어긋나고, 어긋난 기대는 상처가 되며, 상처가 쌓이면 번아웃이 된다.

사실 번아웃은 일이 많다고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애쓴 만큼의 인정이 돌아오지 않을 때 깊어진다. 심리학자 크리스티나 매슬랙은 번아웃의 핵심을 정서적 소진, 냉소, 성취감의 결여로 정리했다. 그 소진의 밑바닥에는 거의 언제나 "이만큼 했는데 알아주지 않는다"는, 채워지지 않은 기대가 깔려 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번아웃 환자들은 게으른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성실하고, 너무 책임감이 강하고, 자기 일을 너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을수록 그 사랑이 보답받지 못할 때의 낙차도 깊다. 가장 헌신적인 사람이 가장 먼저 쓰러지는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겸손은 존경을, 오만은 번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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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성공한 의사 조너선 소크. 위키피디아

 

이 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인물이 소아마비 백신을 만든 의사 조너스 소크다. 1955년 그가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서 인류는 아이들을 마비시키던 공포에서 벗어났다. 방송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물었다. "이 백신의 특허는 누가 갖습니까?" 소크의 답은 짧았다. "글쎄요, 사람들이겠죠.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수 있나요?" 특허를 냈다면 오늘날 가치로 수조 원을 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백신을 세상에 그냥 내어주고, 묵묵히 다음 연구로 걸어 들어갔다. 알아달라 소리치지 않은 그 태도가 그를 인류의 은인으로 가장 오래 기억되게 했다. 자기 일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은 겸손이 역설적으로 가장 큰 존경을 불러온 것이다.

문학은 그 반대편을 보여준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주인공은 자신이 범인(凡人)을 넘어선 특별한 존재라 믿었다. 제 일은 보통 사람의 도덕쯤 초월할 만큼 대단하다고 여긴 오만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영화 '위플래쉬'의 폭군 같은 음악 교사 플레처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천재를 길러내는 위대한 일을 한다고 확신했고, 그 확신은 학생을 학대하는 칼날이 되었다. 자기 일을 지나치게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 무게로 자신과 주변을 함께 짓누른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여기에 오래된 처방을 남겼다. 에픽테토스는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라고 했다. 보호자가 인사 없이 돌아선 사건 자체가 간호사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데 저렇게 대하다니"라는 생각이 그를 무너뜨린 것일 수 있다. 사건은 바꿀 수 없어도 생각은 바꿀 수 있다. "나는 그저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라 여겼다면, 인사가 돌아오지 않아도 아플 일이 없었을 것이다.

자기 일을 조금 덜 대단하게 여기는 것. 그것이 마음을 지키는 가장 단순한 방어선이다. 나는 진료실에서 종종 농담한다. "저도 명의가 되려고 들면 매일 상처받아요. 그냥 오늘 온 환자 한 분 잘 보면 그만이라 생각하면 편합니다." 자기 일을 가볍게 웃어넘길 줄 아는 사람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오해는 말자. 자기 일을 하찮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정말로 대단한 일을 하며 산다. 다만 그 대단함을 남이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순간, 일은 더 이상 일이 아니라 인정을 구걸하는 거래가 된다. 우리가 품을 수 있는 가장 건강한 마음은 이것이다. 굳이 알아달라 소리칠 필요도 없고, 소리친다고 달라지지도 않는다. 의미는 일 자체에 이미 들어 있지, 박수 속에 있지 않다.
 


내 할 일 잘하면 그만… 인정과 존경은 덤

그러니 인정받기를, 알아봐 주기를, 공손히 대접받기를 애써 기대하지 말자. 그저 무심히 내 할 일의 핵심을 해내면 그뿐이다. 화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 미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서비스의 본질일 것이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돕는 일은 답례를 전제하지 않는다. 답례를 전제하는 순간 봉사는 청구서가 된다. 인정과 존경과 감사는 일을 잘 해낸 뒤에 가끔 떨어지는 떡고물 같은 것이다. 떡고물을 목표로 떡을 빚는 사람은 없다. 떡을 정성껏 빚다 보면 부스러기가 떨어질 뿐이다. 그 부스러기를 받겠다고 손 내밀고 기다리는 순간, 떡 빚는 일은 고역이 된다.

자기 일을 덜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일수록 일을 더 오래, 더 즐겁게 한다. 무게를 내려놓으면 도리어 멀리 갈 힘이 생긴다. 몇 달 뒤 그 간호사가 다시 진료실에 왔다. 표정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어떻게 지내셨느냐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제 할 일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고맙다는 말 들으면 좋고, 안 들어도 그만이고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처음으로 웃었다. 스무 해 동안 자신을 짓눌러온 무게를 내려놓은 웃음이었다. 일을 줄인 것도, 환자가 갑자기 친절해진 것도 아니었다. 자기 일을 대하는 마음 하나를 바꿨을 뿐이다.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그 세상을 견디는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내 일을 너무 대단하게 여기는 마음은 결국 남의 박수를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런데 박수를 기다리는 손으로는 일을 할 수가 없다. 두 손이 마주쳐야 박수가 되듯, 두 손이 비어 있어야 비로소 일을 잡을 수 있다. 그러니 내가 하는 일을 너무 대단하게 여기지 마라. 대단함을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그 일이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

우리는 저마다 대단한 일을 하며 산다. 그러나 그 대단함은 누가 알아줘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알아주든 말든 묵묵히 해내는 그 자체로 이미 대단하다.

한창수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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