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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를 붙잡은 건 괴물이 아니었다
고통스러운 과거 속 ‘자신’이었다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ug 23 2026 12:26 PM
들으면 죽을 수 있는 세이렌 노래 스스로 몸을 묶어 미리 행동 제한 의지보다 환경 변화가 도움 되기도
트로이전쟁이 끝났다. 승리한 오디세우스(맷 데이먼)에게 이제 남은 일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길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바다는 그를 자꾸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가는 곳마다 낯선 존재들이 기다린다.
영화 '오디세이'는 이 귀향을 단순한 모험담으로 그리지 않는다. 처음에 오디세우스는 아가멤논과 다른 항로를 택하며 자신들이 더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런데 여정이 길어지면서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오디세우스의 마음이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유독 오래 남아 곱씹게 된 장면이 두 군데 있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기 위해 스스로 몸을 묶는 장면, 그리고 괴로운 기억에서 벗어난 채 살아가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이었다.
귀를 열기 전 몸을 묶은 이유
영화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맷 데이먼)가 귀향길에 만난 망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뱃사람은 그 목소리에 홀려 배를 바위로 몰고 간다고 한다. 위험을 알고 있던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게 한다. 그런데 자신의 귀는 막지 않는다. 대신 몸을 돛대에 단단히 묶게 한다. 아무리 풀어달라고 애원하더라도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고 미리 명령한다. 죽을 수도 있는데 왜 굳이 들으려 했을까.
아마 이유가 하나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도 듣고 살아남지 못한 노래를 자신은 들어보겠다는 호기심과 자신감이 있고 오디세우스 특유의 오만도 조금은 섞여 있었을지 모른다. 많은 죽음과 실패를 자신의 책임으로 짊어지고 있던 사람이기에 굳이 자신을 괴로운 곳으로 밀어 넣는 모습에서 자기처벌적인 욕구도 떠올랐다. 무엇보다 영화 속 세이렌의 노래는 오디세우스가 한쪽으로 밀어두었던 마음을 건드린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더는 피해가기 어렵게 만든다. 어쩌면 그는 노래 자체보다 그 노래를 들은 뒤 드러날 자기 마음이 궁금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게 더 흥미로웠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귀를 열기 전에 먼저 몸부터 묶었다. 흔히 정신과 상담을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진료실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을 만한 조건이다.
정해진 시간에 만나고, 정해진 공간에서 이야기한다. 너무 힘들면 잠시 멈췄다가 다음에 이어갈 수도 있다.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와 경계가 유지된다. 겉으로 보면 그저 형식적인 규칙들이다. 하지만 정신분석과 정신치료에서는 이런 '세팅(setting)' 자체를 치료의 중요한 일부로 본다. 일정한 틀이 반복해서 지켜진다는 경험이 있어야, 평소에는 꺼내기 어려웠던 생각이나 감정에도 조금씩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디세우스의 밧줄도 비슷하게 보였다. 밧줄은 그를 세이렌에게서 멀리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그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해준다. 밧줄이 있었기 때문에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 장면에서 이름을 가져온 '율리시스 계약'이라는 표현도 있다. 미래의 내가 유혹이나 충동 앞에서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예상하고, 현재의 내가 미리 행동의 범위를 제한해두는 방식이다.
"의지로 이겨내려고 하지 마시고 환경을 만드세요." 진료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건네는 말이다. 밤마다 휴대폰을 보느라 잠들지 못한다면 충전기를 침실 밖에 둔다. 술을 줄이고 싶다면 애초에 집에 술을 사두지 않는다. 밤마다 야식을 주문하고 후회한다면 배달앱부터 지우는 편이 낫다. '이번에는 참을 수 있을 거야'라고 자신하기보다 생각처럼 되지 않을 순간을 미리 예상하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도 자신이 세이렌의 노래 앞에서 꼼짝하지 않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아 풀어달라고 애원할 자기 모습을 예상했다. 그래서 마음을 더 강하게 먹는 대신 몸을 묶었다. 많은 경우 의지를 더 다잡는 것보다 나를 붙잡아줄 구조를 먼저 만드는 편이 낫다.
기억을 잊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화 '오디세이'에서 기억을 잃고 살던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에게 집에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하는 장면. 오디세이 예고편 캡처
영화에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흐리게 만드는 로토스가 등장한다. 괴로운 과거에서 멀어진 오디세우스에게 한동안 평온한 시간이 찾아온다. 칼립소도 묻는다. 우리 행복하지 않았느냐고. 이렇게 계속 살면 안 되냐고. 오디세우스 역시 오랜 시간 괴로운 기억을 없애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 고민하고 있지 않았을까.
나는 로토스를 이용한 칼립소의 보호가 처음부터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일을 겪었을 때 당장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먹고 자고 쉬면서 우선 몸을 추슬러야 할 때가 있다. 너무 지쳐 있다면 안전한 곳에서 한동안 숨을 돌리는 것부터 필요할 수도 있다. 진료실에서도 비슷하다. 큰 사고나 상실을 겪은 사람이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그날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말하는 것이 꼭 첫 번째 순서는 아니다. 일상을 조금 회복하고 감정을 견딜 여유를 만드는 일이 먼저일 때도 있다.
다만 보호에도 때가 있다. 처음에는 사람을 살게 했던 방법이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 사람을 제자리에 붙잡아둘 수도 있다. 언제까지 보호하고, 어느 시점부터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도록 도울 것인가. 진료실에서도 꽤 자주 마주하는 고민이다.
칼립소를 보면서 정신치료에서 말하는 '역전이(countertransference)'라는 개념도 떠올랐다. 말은 어렵지만 뜻은 단순하다. 환자가 치료자를 만나 여러 감정을 느끼듯, 치료자도 환자를 만나면서 여러 감정을 느낀다. 어떤 환자를 보면 너무 안쓰러워 계속 보호해주고 싶어진다. 힘든 이야기를 꺼냈다가 더 괴로워질까 봐 그 주제를 건드리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반대로 좀처럼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조급하거나 답답해지기도 한다.
치료자도 사람이니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다만 그 감정이 환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는지, 어느 순간부터 치료를 방해하고 있는지는 계속 살펴봐야 한다. 지금 이 보호가 정말 이 사람에게 필요한가. 아니면 내가 이 사람이 괴로워지는 모습을 견디기 어려워서 붙잡고 있는가. 칼립소를 보면서도 그런 경계를 생각하게 됐다. 오디세우스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원하는 것이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같은 방향이었을까.
우리에게도 로토스가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는 꼭 전쟁이나 큰 외상을 겪은 사람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도 힘든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피한다. 너무 지친 날에는 하루 종일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한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그날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싶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정반대로 계속 일을 만든다. 가만히 있으면 괴로운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시간도 필요하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문제를 붙잡고 끝까지 생각해야 한다면 너무 견디기 어렵다. 영화를 보고 잠을 자고, 친구와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조금 살 것 같은 힘이 생긴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큰 불안을 경험한 뒤 한동안 외출을 줄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불안해질까 봐 지하철을 타지 않고, 친구도 만나지 않기 시작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불안할 일은 줄어들지만 동시에 갈 수 있는 곳도 줄어든다. 실패가 무서워 시작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원했던 것을 얻을 가능성도 함께 사라진다.
그래서 진료실에서도 무조건 "피하지 마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은 그 장소와 사람을 멀리하라고 이야기할 때도 있다. 다만 언젠가는 다시 살펴봐야 한다. 아직 조금 더 숨을 때인지, 아니면 아주 작은 한 발이라도 다시 떼어볼 때가 된 것인지. 처음 나를 살게 해준 방법이 언제까지나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은 아니니까.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괴물도 있고 폭풍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어려움은 그것만이 아니다. 지나온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기억 속에서만 계속 살아갈 수도 없다. 너무 힘들 때는 잠시 피했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다시 자신의 삶으로 발을 돌려야 한다.
우리는 흔히 회복을 고통이 사라지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불안하지 않고, 우울하지 않고, 아픈 기억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 상태 말이다. 하지만 회복은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나 기억을 안고도 다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여전히 불안하지만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본다. 그 사람 이야기를 하면 아직 눈물이 나지만 다시 친구를 만나기 시작한다. 실패할까 두렵지만 그래도 원서를 한군데 넣어본다.
오디세우스의 귀향도 그런 의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과거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가 여전히 자기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자신의 삶을 향해 움직이는 것. 오디세우스에게 가장 오래 걸린 것은 이타카까지의 길보다 다시 그 삶으로 돌아갈 마음을 만드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허규형 연세가산숲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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