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구르는 돌, 멈추지 않는 삶의 지혜를 찾아서
이남수(문인협회)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ug 27 2026 11:06 AM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의 특별한 학습 자료를 통해 처음 만났던 문장,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라는 이 말은 오래도록 내 삶을 관통하는 상징처럼 남아 있었다. 남편 이름에 ‘돌 석(石)’ 자가 들어 있어 장난스럽게 이 속담으로 놀리곤 했지만, 사실 내게 이 말은 늘 도전하고 변화하는 삶의 찬가였다.
Chat GPT 생성 이미지
어린 시절 가을이면 텃밭 감나무에 올라 붉게 익은 홍시를 따곤 했다. 높은 가지 위에서 멀리 큰길을 내려다보며, 저 길 너머에는 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늘 궁금했다. 지방에서 초중고를 마친 뒤 서울로 대학에 가면서 나는 이미 그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에는 전국 곳곳을 등산하고 답사하며 누볐고, 결혼 후에는 미국과 캐나다, 영국을 오가며 많이 돌아다녔다.
그렇게 살아온 내게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라는 서양 속담은 곧 부지런히 노력하고 도전하는 삶의 태도를 의미했다. 어쩌면 ‘하면 된다’라는 구호 아래 달려온 한국 근대화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해석이었을지도 모른다.
궁금한 마음으로 인공지능에 물어본 적이 있다. 왜 한국에서는 이 속담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을까. 인공지능은 근대화 과정에서 개인의 도전 정신을 중시하게 된 사회적 변화를 그 배경으로 설명했다. 시대가 변하면 고정관념도 함께 바뀐다.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남귤북지(南橘北枳)의 속담이 있다. 사람이나 사물은 처해 있는 환경에 따라 그 성질이 변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환경에 따라 본질의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고, 한때 부정적으로 여겨졌던 ‘역마살’ 역시 이제는 외교관이나 해외 활동이 활발한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긍정적 이미지로 변해가고 있다. 속담의 해석 또한 시대와 문화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난다.
어느 날, 60~70대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영국사 공부 모임에서 각자 속담의 의미를 풀이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나는 말했다.
“늘 배우고 노력하며 움직이면 우리의 머리와 삶은 녹슬지 않습니다.”
그러자 존이라는 70대 영국 노인이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자꾸 옮겨 다니고 이사하면 역사가 쌓이지 않아요. 한곳에 오래 머물러야 관계와 문화가, 오래된 건물의 푸른 이끼처럼 차곡차곡 쌓이는 거죠.”
그 순간, 그의 말은 마치 내가 평생 믿어온 삶의 방식에 조용한 균열을 내는 듯했다. 내 삶을 비추던 익숙한 조명이 툭 꺼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과연 나의 ‘구르는 돌’은 이끼 하나 남기지 못한 허무한 움직임이었을까. 한동안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렁였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아왔다고 해서 내 삶에 역사가 쌓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영국 노인의 말은 내 안의 고정관념을 깨고, 나 자신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오래된 해석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영역까지 넘보는 시대,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간다. 이제는 사물의 다면성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다. 그래야 창의성이 열리고, 기존의 생각과 현실 사이의 틈에서 새로운 창조가 태어난다.
고인 물은 썩는다. 움직여야 시냇물이 되고, 폭포가 되고, 강물이 되어 마침내 바다로 흘러간다.
이제 내게 ‘구르는 돌’은 나이가 들어도 늙지 않는 마음, 여전히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품는 청춘의 상징이다. 내 삶은 그렇게 흘러왔고, 지금도 여전히 흐르는 중이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일이 치매 예방에도 좋다니, 나는 앞으로도 계속 움직이며 살아갈 것이다.
물론 늘 새로운 것만 좇는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살아온 경험을 내 안에서 숙성하고, 지나온 시간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며 통합하는 과정,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나이 듦이 주는 진정한 지혜일 것이다. 언젠가 이름 없는 강가에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앉아 지나온 시간을 천천히 유영하며 내 삶의 역사를 정리하는 날이 오겠지. 그리고 그 시간은, 결국 나에게 글쓰기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이름의 롤링스톤이 되어 떠나는, 추억 여행처럼.

www.koreatimes.net/오피니언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