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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지정학의 시대
미·일·중·러 ‘4網’ 경쟁 속 한국의 전략은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Aug 30 2026 02:28 PM
최근 첨단 디지털 기술을 둘러싼 지정학 경쟁이 거세게 전개되고 있다. 과거 ‘아날로그 지정학’이 주로 오프라인 공간의 물질적 영토자원을 놓고 벌인 국가 행위자들의 경쟁이었다면, 오늘날의 ‘디지털 지정학’은 온라인 공간을 구성하는 네트워크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다양한 행위자들의 경쟁이다.
한반도 주변 상황도 마찬가지다. 미·일·중·러로 대변되는 네 개의 ‘네트워크 국가’, 즉 ‘주변4망(網)’이 벌이는 디지털 지정학 경쟁이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다. '주변4망'의 경쟁에 맞춰, 한국도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하되 대체불가한 핵심 국가가 되기 위한 자체 디지털 안보망을 구축해야 한다.
미국, 폐쇄형 표준전략

디지털 기술이 한반도 주변 안보상황을 흔들고 있다. 한미연합작전에도 인공지능(AI) 기술을 적용한 지휘통제체계 구축이 진행되고 있다. 한화시스템 제공
디지털 지정학의 추세를 선도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첨단기술 육성을 위해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인공지능(AI) 액션플랜’ ‘제네시스 미션’ 등과 같은 국가적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도 ‘안보화’의 논리를 내세워 중국에 대한 수출입 제재를 부과하고, 미 기업들도 첨단 기술의 보호를 위해 ‘폐쇄형 표준전략’을 채택했다. 이러한 양상은 최근 AI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안보화를 넘어선 ‘군사화’의 조짐도 만만치 않다. 올해 초 발발한 미국·이란 전쟁은 그야말로 AI·데이터 플랫폼을 활용한 지정학적 갈등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미국은 자국 기술을 바탕으로 디지털 국제질서의 재편도 노리고 있다. 지난해 7월 발표한 ‘미국식 AI 풀스택’ 구상이 대표적 사례다. AI 모델뿐만 아니라 반도체, 소프트웨어, 플랫폼, 서비스 등을 패키지로 묶어서 동맹·우방국에 수출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엔비디아가 펼치는 ‘GPU 패권’의 행보는 미국의 풀스택 구상을 실현하려는 빅테크 기업 차원의 시도로 해석된다. 외교 분야에서도 이 구상의 실현을 뒷받침하는 양자·다자 협력이 진행 중이다. 특히 지난 6월 미국 주도로 개최된 ‘제2차 팍스 실리카 서밋’에서는 AI·반도체 공급망 안보를 위한 공동성명에 35개국이 서명했다.
일본, 미일 디지털 동맹에 사활
일본도 반도체 산업의 부흥을 꾀하며 디지털 지정학 경쟁의 전선에 나섰다. 일본은 대만·미국 기업들과 협력하여 구마모토(TSMC), 홋카이도(IBM), 히로시마(마이크론) 등에 권역별 반도체 거점을 구축 중이다. 일본이 모색하는 전략의 기본 방향은 미일 디지털 동맹의 강화다. 이는 반도체 공급망과 AI 거버넌스·규범뿐만 아니라 군사 분야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미일 양국은 AI 기반 통합지휘체계 구축, 군사 기밀정보 공유 확대, 사이버 안보 역량 강화, 미국 민간 클라우드 도입, 차세대 전투기 연동 무인기 도입 등 공동사업의 추진을 발표했다.
AI 유엔으로 맞서는 중국

12일 중국 베이징 하이덴구에 설치된 로봇 편의점에서 중국의 로봇 기업 갤봇이 개발한 G1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에 맞선 새로운 AI 생태계 구축을 추진 중인 중국의 속도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베이징=이혜미 특파원
중국도 성숙공정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태양광, 로봇 등에서 기술력을 키워가고 있다. 미국의 제재 속에서도 나름의 혁신을 멈추지 않은 결과로 풀이된다. 그 결과 중국이 첨단 제조업까지 넘본다는 ‘차이나 쇼크 2.0’이 거론되고 있다. AI 분야에서도 지푸AI(GLM-5.2), 문샷AI(키미 K3), 알리바바(큐웬3.8) 등은 미국의 AI 모델 못지않은 성능을 자랑한다. 이 밖에 창신메모리 상장, EUV 노광장비 개발, 유니트리로보틱스 상장 등도 화젯거리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중국 기업이 ‘개방형 모델’의 확산을 통해서 저변을 넓혀가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적 AI 생태계를 구축하여 미국에 대항하려는 중국 AI 기업들의 움직임도 감지된다. 화웨이(슈퍼포드), 알리바바(세일), 센스타임(은하계획), 지푸(데이터센터), 딥시크(V4) 등이 그 도전의 주역들이다. 중국의 독자적 질서 구축 시도는 AI 외교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올해 7월 ‘세계AI협력기구(WAICO)’ 설립 구상에 29개국이 서명했다. WAICO는 작년에 중국이 ‘AI 분야의 유엔’을 염두에 두고 제안한 국제기구 설립 구상이다. 한편 최근 미국·이란 전쟁의 양상과 중동발 에너지 불안이 중국의 군사 AI 자립을 자극하고 핵심 광물 공급망에 대한 인식을 강화했다는 사실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러시아, 북한과 디지털동맹 가능성

2024년 6월 19일 김정은(오른쪽)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 금수산 영빈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28년 만에 양국 동맹관계의 전격 복원 내용이 담긴 조약을 체결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군사조약’은 디지털 지정학적 관점에서도 함의가 매우 크다. 연합뉴스
러시아도 여전히 잊어서는 안 될 디지털 주변4망의 한 축이다. 러중 디지털 협력 분야로서 디지털 루블·위안화 결제망이나 얀덱스·화웨이 기술협력 등이 거론되지만 아직은 미국에 대한 대항 담론을 제기하는 수준이다. 북한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파병 이후 러북 양국이 체결한 ‘군사조약’의 디지털 지정학적 함의는 매우 크다. 단거리 방공시스템, 전자전 장비, 전파 교란장치, 화력·미사일 데이터 피드백, 정찰위성 발사·미사일 고도화 지원, 북한 인력의 러시아 사이버 작전 참여 등의 분야에서 러북 양국은 전례 없는 군사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미·일·중·러 주변4망이 벌이는 디지털 지정학의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읽어내는 ‘독시(讀時)’의 과제가 제기된다. 역사적으로 이들 국가가 벌이는 경쟁과 그 결과로 발생한 ‘세력균형’의 변동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구조적 변수였다. 디지털 지정학 시대를 맞아서도 이들 네 나라가 펼치는 네트워크 전략과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세력망(網)’의 동태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향후 미래 국가전략의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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