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주간한국
‘해고 노동자=빨갱이’ 낙인 지워낸 이창동
창작자의 윤리를 묻다
-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 Sep 27 2026 03:24 PM
영화 ‘가능한 사랑’
국내 대기업 SP중공업의 용접공 호석(설경구). 아들 이름을 ‘철’이라고 지을 만큼 용접과 회사가 삶의 중심축이다. 하지만 마당이 있는 작은 시골집을 사서 몇 년에 걸쳐 정원을 다 꾸몄을 때쯤,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글로벌 사모펀드가 SP중공업을 인수해 단행한 구조조정으로 직원 40%가 해고되고 호석도 그중 한 명이 된다.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공장에 들어가 옥쇄 파업을 벌이지만 헬기를 동원한 공권력에 진압당한다. 경찰에 맞고 감옥에 수감되며 삶이 붕괴됐지만 호석은 심리 치료도 거부한다. 함께 파업에 참여했다 자살한 동료의 장례식장을 찾은 날, 호석과 그의 아내 미옥(전도연)은 그들의 삶을 찍고 싶어 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와 그의 남편 상우(조인성)를 만난다.

영화 '가능한 사랑'의 해고 노동자 호석(설경구)과 아내 미옥(전도연), 아들 철(정섶). 넷플릭스 제공
이창동 감독의 8년 만의 신작 ‘가능한 사랑’이 21일 국내에서 처음 언론에 공개됐다. 이달 12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2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영화는 쌍용차 집단 해고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2009년 경찰은 옥쇄 파업 노동자들을 강제 진압했고 이후 노동자들의 자살이 잇따랐다. 이창동 감독은 그동안 “특정 기업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말아달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10여 년 전 한국의 정리해고와 강제 진압에 큰 충격을 받아”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밝혀왔다. 영화는 노동자들의 후유증을 깊게 들여다본다. 심리 치료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말한다. “열심히 일할 때는 ‘노동 귀족’이라더니, 파업하니까 ‘빨갱이’라 부른다”고. 이날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의 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 감독은 노동자들의 생생한 육성을 담은 데 대해 "일을 잃어버려 정체성을 상실한 것 같고 텅 빈 자아를 느끼는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에게 덧씌워진 부당한 낙인을 지운다. 빈한했던 미옥과 호석의 청소년 시절 첫 만남부터 봉제공장에서의 노동, 가정을 꾸려온 과정을 공들여 보여준다. 이들이 ‘귀족’이나 ‘빨갱이’가 아니라 우리 옆의 평범한 이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영화의 역할에 대해 묻고 싶다”고 강조해왔다. ‘가능한 사랑’은 타인을 깊이 이해하게 하고, 나아가 사랑의 가능성을 잉태하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창동 감독이 21일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가능한 사랑’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영화는 단순히 해고 노동자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여러 층위가 겹겹이 쌓인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또 하나는 계급 문제다. 호석과 미옥이 노동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다져가는 서민이라면, 예지는 결혼으로 계층 상승을 이룬 여성이고 예지의 남편 상우는 할아버지 때부터 유복했던 투자전문 펀드계의 큰손이다. 커다란 사건 없이도 이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이 웃음과 공감을 자아낸다.
창작자의 윤리도 끈질기게 묻는다. 호석 가족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예지는 “저 사람들을 사랑하려 한다”고 하지만 미옥이 속내를 꺼낼 때마다 “카메라 앞에서 다시 하자”며 말을 끊는다. 노동 문제를 다루려 영화를 만드는 것인지 성공한 감독이 되기 위해 이들의 삶을 이용하는 것인지, 줄곧 경계를 넘나든다. 예지의 정체성이 자신과 가장 닮았다는 이 감독은 “타인의 삶을 영화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사용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는 평생 해온 질문”이라며 “지금도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큰 사건 없이 진행되는데도 세 시간 가까운 러닝타임(164분)이 짧게 느껴진다.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과 결핍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이야기가 주는 몰입감 덕분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빼어나다. 전도연은 “100년에 한 번 나올 법한 명연기”라는 외신의 평가가 과장이 아닐 만큼 미옥을 탁월하게 표현했고, 설경구의 연기는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리며 고통을 전한다. 음악도 영화와 완벽히 공명한다. 정재일 음악감독이 만든 피아노곡은 애잔하면서도 긴장되고, 그러면서도 흐릿하게 희망을 품은 듯한 초월적 정서를 전하며 여운을 남긴다.

영화 '가능한 사랑'의 호석(설경구·왼쪽부터)과 미옥(전도연), 예지(조여정), 상우(조인성). 넷플릭스 제공
외신의 반응은 뜨겁다. 이달 6일 베니스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된 후 영화 평론 사이트 로튼토마토의 신선도 지수(평론가 지수)는 100%를 기록했다. 극장에서는 23일 개봉한 후 2주 동안만 상영한다. 내년 3월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한국 출품작으로 선정된 터라, 영화 제작국에서 최소 2주 이상 개봉해야 한다는 출품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다. 영화를 제작한 넷플릭스에서는 11월 6일 공개된다.
이 감독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영화를 완성시키는 것은 결국 관객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 속에서 저희 영화가 좀 더 힘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남보라 기자
www.koreatimes.net/주간한국
미디어1 (media@koreatimes.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