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익었나 맛 좀 보자. 냄새만 요란한지, 제대로 맛도 들었는지 나도 궁금했다. 문 앞에 세워둔 가방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묻기는커녕 가방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 더운 김이 오르는 흰 밥을 수북이 담았다. 수아가 내 집을 찾는 날은 괜히 분주하다, 뭐든 먹이고 싶어서. 오늘 나의 동동거리는 분주함을 통해 수아는 뭘 생각할까? 궁금해도 아닌 척 가장하는 내게서 어쨌든 먼저 묻지 않는 고집스러운 뭔가를 또 읽을 것이다. 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서 다 말하게 해요. 들어서 난감할 것 같은 일엔 절대로...
나는 지금 손녀들이 살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와 있다. 8월 초이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할 정도로 기온이 낮다. 오늘 아침 기온이 영상 12도, 뉴스에서는 61년 만에 찾아온 추운 여름으로 태평양에서 넘어온 구름이 하늘 가득해, 낮은 기온 현상이 나타났다는 설명이다.캘리포니아의 5번 고속도로를 따라 LA로 가노라니 이런 특이한 야산의 풍경을 자주 보게 된다.photograph by Wes Golomb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산호세까지 약 1시간 정도 오는 동안, 도심을 지나 바다를 건넌 뒤에는 누런 작은 야산들이 계속 이어...
2주가 넘는 긴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우버택시로 토론토 공항에서 출발할 때 마음이 설렜다. 우리 집은 무사한가? 한여름의 뙤약볕을 어찌 견뎠을까?...집 앞에 도착하여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눈이 휘둥그래졌다.우리 집이 환했다. 앞뜰의 입구에서부터 울타리의 무궁화나무의 꽃들이 가득 피어나 빈집을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2주 전, 집을 나설 때는 초록의 몽오리로 닫혀있어 눈에 잘 띄지도 않았던 것들이 그 사이 하얗게 혹은 분홍과 보라의 꽃등을 켜서 집을 온통 환히 밝히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 떨어져 흩어져있는 꽃잎들조차 운치를 ...
현관 벨이 울렸을 때 나는 급히 창문부터 열었다. 창을 열자 공원으로부터 바람이 밀고 들어왔다. 집안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냄새가 있었다. 현관문 밖에는 수아가 서 있었다. 수아는 어쩌면 내가 끊었던 담배를 다시 시작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틈 사이로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담배 냄새 스트레스엔 같이 피우는 것이 약이라고 했더니 수아가 말했었다, 그러지 말아요, 언니. 힘들게 끊었는데.라고. 좀 심하지, 이 냄새? 현관문 앞에 선 채 좀 큰 소리로 냄새부터 들먹였다. 수아가 몇 번 코를 킁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
파라콰트(그라목손). 제초제의 유명한 한 종류다. 제초제란, 말 그대로 풀을 죽이는 약품으로, 원하지 않는 풀을 죽이는 데 쓰이는 물질이다. 당연히 농업이나 정원 관리 등에 널리 사용된다.농경을 시작한 이후, 인류는 오래전부터 제초제를 찾아 헤맸다. 황산, 비소, 구리염, 석유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약품은 독성이 강해 풀을 어느 정도는 죽일 수 있었지만, 살포하는 사람까지 죽을 수 있었다. 게다가 가격도 비쌌고 땅도 망가지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이번에 소개할 파라콰트는 1955년에 제초제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약물을 발...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의 1859년 작 키스는 여러 면에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키스와 비교된다. 하예즈의 키스는 클림트의 것에 비해 반세기 앞서 그려졌고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두 그림의 차이는 고전적 사실주의와 아르누보 스타일의 형식적인 것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프란체스코 하예즈의 키스.클림트의 입맞춤은 존재의 심연에서 충동질하는 에로티시즘을 웅변한다. 사적이고 감각적이다. 상대는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으로 특정된다. 그림에서 플뢰게는 감정에도취돼 있다. 반면 하...
기후 변화, 분쟁 등 세계는 여전히 중대한 과제에 직면해 있지만, 전 세계적인 생활 수준은 조금씩 긍정적으로 향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갤럽이 최근 발표한 인생평가지수(Life Evaluation Index)에 따르면, 세계인의 33%는 자신의 삶에 대해 번영(Thriving) 단계로 평가했다. 또 번영률이 증가하면서 반대로 고통 상태로 분류된 비율은 점차 감소하고 있다. 갤럽은 2024년 고통률은 7%이며, 이는 2007년(7%) 이후 최저치라고 설명했다. 갤럽은 삶의 질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은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다양한 인구 집단...
중국 경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연평균 8%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세계 제조업 총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며 최대 생산기지가 된 지 벌써 십수 년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GDP)은 2000년 958달러에서 2024년 1만3,121달러로 약 13.7배 늘었다.시진핑(가운데) 중국 국가주석 등 최고 지도부가 지난해 7월 18일 중국 베이징의 징시호텔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결의안을 거수로 통과시키고 있다. 베이징=신화 뉴시스경제 성장과 국방력 증대까지 일궈낸 중국은 미국...
다툼의 이유가 늘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날 나는 남자를 떠날 수도 있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버텼었다. 워낙 허술한 시작이었으니 다툼의 요소는 갈피마다 함정처럼 숨겨져 있던 것이 그때의 내 삶이었다. 마치 어설프게 쌓은 장난감 블록처럼 어느 하나만 제 자리를 이탈해도 그대로 와르르 무너질 소지를 지닌 것이 내 울타리였는데, 비록 얼기설기 엮은 담장처럼 허술했어도 안간힘으로 버틴 건 실은 내가 외면한 어머니 때문이었다. 날 밟고 가라! 어머니는 그때 사내를 앞세우고 집을 떠나려는 내 앞에서 그 말 한마디를 하며 정말 눈을 뒤집...
참 더웠다, 그날. 더위에 약한 내가 숨이 턱턱 막히는 한더위에 길을 나선 것은, 청탁받은 작품을 보낸 후의 해방감 때문이었다. 늘 나이아가라 주변만 맴돌다가 이웃 동네에 사는 친구의 빨간색 스포츠카로 장 보러 QEW 길에 나섰으니, 덥거나 말거나 신나던 장거리 여행이었다. 처음 간 옥빌 갤러리아에서 나는, 멀리 노르웨이서 잡힌 냉동 고등어를 샀고, 냉면을 샀고, 서리태라 부르는, 검정콩 한 망태기를 샀다. 냉면 외의 것은, 즉흥적으로 담은 것인데, 내 관심은 실은 냉면이었다.서리태는 좀 많나, 싶었지만 변하는 것 아니니 두고두고...
나, 안 살 거야. 잠든 아이를 등에서 내려 눕힌 딸이 대뜸 말했다. 아이 머리맡에 앉은 딸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누르스름하게 탈색된 까실한 머리카락은 이마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고 오기 전에 뒤엉켜 한바탕 치고받기라도 했던지 차림새며 표정이 한 번 쥐어짰다 편 손수건 같았다. 무슨 일이야 이 야밤에? 요동치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내가 물었다. 늦은 시각에 어수선한 꼴로 아이를 업은 채 내 집 문을 들어서던 그때부터 이미 비정상적으로 두근대던 가슴이었다. 전후 사정은 잘라 버리고 대뜸 안 산다.는 말부터 한 딸은 내 물음에...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은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 널리 읽히지만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독자가 많이 있다. 왜 그럴까?1942년에 초판이 발간된 이방인은 일인칭 소설로서 주인공 뫼르소(Meursault)가 화자(話者)이다. 그는 알제리에 살고 있는 평범한 회사원인데 매사에 무관심하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녀가 살고 있던 양로원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해서 부모를 여읜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도 않고 관 속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시신 보기를 거부하는 등 상주의 신분에 걸맞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장례식 후에는 어머니의 묘소에 참배도 ...
어린 아들의 손에 남편과 딸을 잃고, 자신은 살인자의 엄마라는 지워지지 않는 낙인 속에서 살아가는 여인이 있다. 그는 자신을 향한 세상의 경멸과 폭력에도 저항 없이, 깨진 계란으로 묵묵히 오믈렛을 만들며 속죄하듯 하루를 버틴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이토록 끔찍한 비극의 잔해 속에서, 관객에게 근원적이고도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아이는 악마로 태어나는가, 아니면 악마로 길러지는가?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틸다 스윈튼). 티캐스트 제공자유로운 여행가였던 에바는 원치 않은 임신으로 아들 케빈을 낳으며 삶이 180도 달라진다. 케빈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