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마지막 구간에서였다. 있는 힘을 다해 달리는 주자들 사이에 작은아들이 보였다. 나름대로 속도를 조절해서 그런 건지 제법 힘차게 최종 도착 지점에 들어섰다. 어떤 선수는 지쳐 힘들어하며 도착점에 골인하기도 했다. 다리가 약간 불편해 보이는 참가자도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친구와 함께 최종 구간을 같이 달리며 마라톤 완주의 기쁨을 나누는 주자도 있었다. 응원 나온 가족이나 친구들은 최종 완주자 누구에게나 다 박수와 함성을 보내 주었다. 모두 한 식구가 되는 시간이었다. 피날레를 장식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환영...
캐나다가 나에게 주었던 첫 인상은 블루였다. 이민을 염두에 두고 밴쿠버로 답사를 왔을 때, 저녁 어스름에 올려다 본 하늘은 크고 작은 별들을 품고있는 코발트 블루였다. 엽서에서 보았던 이국의 하늘 빛깔이 어느 정도는 물감으로 덧칠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색깔 그대로 내 눈 앞에 펼쳐있었다. 한국에서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청청한 쪽빛 하늘. 넋놓고 바라보는데 표현하기 힘들 만큼 시원한 기운이 가슴을 채워 주었고, 이민에 대한 망설임을 정착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Chat GPT 생성 이미지크레파...
찌는듯하던 더위가 주춤하고 제법 선선한 주말에 딸이 따끈따끈한 파스타를 만들어 왔다. 예쁜 유리그릇에 정갈하게 담긴 그 음식을 대하는 순간 눈이 즐거웠다. 요즘 입맛이 없던 나는 좋은 식재료가 듬뿍 들어간 파스타로 오랜만에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였다. 밥이 당기지 않아 저녁에도 같은 음식으로 한 끼를 때우고 나니 솥에 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옛날엔 찬밥이 귀찮은 존재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 방식대로 고소한 누릉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곧장 약불에 팬을 올려놓고 소량의 물을 부은 다음 그 위에 밥을 얇게 펼쳐놓았다. 주걱...
창밖 날씨가 예사롭지 않다. 강풍에 눈발은 거의 수평으로 휘몰이를 하며 유리창에 부딪히고, 포효하는 바람 소리는 을씨년스러움을 더한다. 책을 무릎에 펴고 소파에 앉아있는데 집중이 되질 않고 눈이 자꾸 바깥을 향한다. 오늘이 토요일이라면 아마 산행에 나섰을 것이다. 비가 내리거나 오늘같이 악천후일 때 가끔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갔다 와서 후회한 적은 없다는 이유로 망설임을 접곤 했었다. 이런 날도 숲속은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고 평온할 때가 많다. 벌거벗은 나목들이 벽이 되고, 침엽수들이 지붕이 되어 지켜주는 위로를 겨...
요즘 유튜브에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이 한창이다. 이 프로그램이 현재 방영 중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42년 전, 1983년 6월 30일 KBS에서 시작한 이산가족 찾기 특별 프로그램 생방송을 지금 재방송하고 있었다. 남편의 스마트폰에는 이런 프로그램이 없는데 왜 나의 폰에만 나오는지. 아마 나의 내면에 깊이 침잠한 전쟁의 외상, 트라우마를 누군가 알아챈 듯, 그래서 이런 영상이 나오지 않았는지 짐작해 본다. 꼭 나의 속마음을 AI에게 들킨 것 같다. 다 알아, 너도 이산가족이지 말하는 것 같다. 구구절절 이산가족의 피맺힌 한이 ...
우리 동네 새들은 여름밤 언제 잠드는지 몰라도 일어나는 시각만큼은 오전 3시 반 경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쩌다 며칠 동안 잠들지 못해 뒤척인 적이 있었다. 그때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기관은 청각이리라.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계 덕분에 방 안은 고요 그 자체였다. 외등이 있어 칠흑 같은 어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적막을 뚫고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귀 밝은 사람은 그 소리에 잠이 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쉼 없이 지저귀는 낭랑한 새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는 어느새 잠들 수 있었다.Chat GPT 생성 이미지어릴...
여행길에서는 낯선 사람들과도 쉽게 가까워진다. 오늘은 집합 장소에서 승차장까지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다양한 여행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겨운 분위기였다. 국적은 서로 달라도, 같은 길을 걷는다는 연대감 때문이라 믿었다. 하지만 승차장에 도착해 우리가 타고갈 소형 버스 앞에 서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무더위에 지친 탓인지 한 줄이던 것이 슬그머니 두 줄로 엉키면서 질서가 무너졌고, 나는 얼결에 뒤로 밀려났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승차는 바로 내 앞에서 끊겼다.Chat GPT 생성 이미지이번엔 탈 수 있겠지 했는데, 가이...
꽃보다 더 꽃다운 나이 열일곱에 어머니는 시동생 하나 시누이 넷인 가난한 농촌의 장남에게 시집오셨다. 시집온 지 한 달 만에 아버지를 육 이오 전쟁터로 보내시고 삼 년 동안 긴긴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아들만 다섯 낳아 군에 보낸 후, 보름날 장독대 위에 정한수 떠 놓고 무탈하게 돌아오길 빌고 빈 시간이 또 반 청춘이었다. 아들 못 낳는다는 구박은 안 받았지만, 아기자기한 딸 키우는 재미는 없었다. 설거지며 집 안 청소에서 어머니를 도와주는 아들 하나 없었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네가 딸로 태어났으면 나를 좀 도와주고 좋았을 텐데라고...
이 건물 21층이라던데 몇 호랬더라. 나는 V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받아 가던 중이었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V의 아파트는 높게 솟은 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복도에서부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와서 몇 호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문을 여니 일찌감치 도착한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신발을 벗어 둘 공간마저 부족했다. 챙겨온 과자를 V에게 건네주고 분주한 그와 잠시 인사를 나눴다.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본 적 없는 얼굴들과 몇몇의 익숙한 얼굴들이 이 방 저 방을 메우고 있었다. 빨간 플라스틱 술...
이른 아침 살짝 커튼을 열면 창밖에 서성대며 수줍게 배시시 웃는 무궁화꽃을 마주한다. 기지개를 켜며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하는 것 같다. 새벽부터 소리 없이 꽃술을 활짝 열고, 젊음을 한껏 뽐내다가 해가 서편에 지면 서서히 꽃잎을 닫는 무궁화, 우리나라 꽃은 여름 한철 끊임없이 피고 또 핀다. 푹푹 찌는 폭염에도 아랑곳없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태양을 향해 마주 보며 활짝 웃는다. 그리고 노을과 함께 살포시 꽃잎을 접는다.Chat GPT 생성 이미지동네를 걷다 보면 이집 저집 무궁화꽃이 만발하다. 행여 우리나라 사람이 사는가. 호기심...
평소 산책하던 걷기 적당한 위치에 있는 도서관으로 노트북과 노트, 한 권의 책과 안경 등을 챙겨 부지런히 집을 나선다. 중간에 coffee shop 에 들러 커피와 빵을 챙긴다.제법 차가운 바람이지만 그리 싫지 않은 상쾌한 날씨에 청명한 하늘과 투명한 햇빛은 덤으로 누리는 계절의 선물이다. 음악과 함께 늦가을의 단풍과 낙엽들이 흐드러진 길을 걷다 보니 몇 번의 가을이 내 앞에 있을지, 셀 수 없이 많이 보고 지나치던 길이며 주변의 풍경들이 갑자기 생경스러워져 셀폰의 카메라로 몇 장 담아본다. 카메라 속의 늦가을 단풍색은 약간 바래긴...
늦은 밤 아파트 창문 너머로 어둠을 가르며 달리는 기차가 보인다. 번쩍이는 불빛이 한줄기 바람처럼 빠르게 지나가면서 긴 여운을 남긴다. 커튼을 내리고 하루를 마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감으니 처음으로 기차를 탔던 기억이 오래된 그림책을 보듯 정겹게 떠오른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할머니와 30리 길을 걸어서 소정리라는 작은 시골 기차역에 도착하였다. 차표를 사자마자 서두르라는 안내원의 재촉에 뛰다시피 개찰구를 빠져나오니, 커다란 증기기관차가 칙칙 푹푹 큰소리를 내며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거...
두 달 동안 K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다. 평소 사흘이 멀다 하고 소식을 주고받던 사이인데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카톡을 보냈다.지난해 세 차례 이사 끝에 원하던 타운하우스를 구매한 K는, 연말연시에는 집 정리로 바빠질 거라고 했다. 크리스마스 인사를 끝으로 그가 한가해지면 먼저 연락해 오리라 생각하며 무심히 지내오던 터였다. 워낙 열심히 사는 K는 시간이 항상 부족한 사람이다.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내는 나와는 전혀 다른 유형이랄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나와 같은 학교에 다녔고 집안끼리도 가깝게 지내온 그는, 한국에서 교사 생...
조용하던 오후가 들썩거렸다. 남편이 부엌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떡볶이를 만든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대단한 요리도 아닌데 부엌만 어지럽히겠다는 생각이 앞섰고 양배추 생각도 났다. 같이 넣으면 좀 덜 맵겠지. 엊그제 먹던 양배추가 남았던 것 같아 냉장고 문을 열고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정말 말 그대로—몸이 반으로 꺾인 듯한 통증이 밀려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숨이 턱 막히고 정신이 아득할 만큼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기어가다시피 거실 소파까지 가서 몸을 눕혔다. 걸을 수도, ...
점심을 먹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오늘은 흐린 하늘 아래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나무들이 바람 몸살을 앓고 있었다. 발코니 너머 늘씬한 단풍나무는 유연하게 이리저리 흔들리고, 뿌리 깊은 소나무는 든든하게 자리를 지킨다. 아카시아 역시 거친 바람 속에서도 뽑히지 않고 나름의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보며, 나는 문득 젊은 날 온몸으로 맞섰던 수많은 바람을 떠올렸다.Chat GPT 생성 이미지제주 모슬포는 바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바람이 너무 심해 못 살겠다, 못 살겠다 하다가 모슬포가 되었다는 원주민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