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협회 은발(Silver thread among the gold)

찬바람이문틈으로새어들어온다.날씨가 스산하고 마음까지 가라앉는 날이면 그리움을품고 있는 노래를듣는다.손편지로마음을곡진하게나누었던친구만큼이나 속깊은곳을 만져주었던 홍하의골짜기, 메기의 추억,은발,스와니강...등 미국민요를 좋아했는데 나는 특히 은발을 좋아했었다. 가사 내용보다 부드러운 물결처럼 애잔하게 흐르는 가락에더 끌렸던 것 같다. 금빛사이에은색으로물든 연인의 머리카락을 보며 회한과격려를그린노래가 문득 떠오른 건, 그분들과의만남때문인지도모르겠다.Adobe Stock얼마전,지인 한 사람이 전화를했다.자신이다니는교회 시니어칼리지에있는자...

문인협회 아버지의 잔영

며칠 전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았다. 아니 느꼈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꿈속에서는 사람의 형체를 본다기보다 느낌으로 그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건 아닐까. 지나온 꿈을 더듬어 보건대 아버지가 등장하는 꿈은 내 마음 상태가 불안정할 때 주로 꾸었던 것 같다.Adobe Stock​​어릴 적 우리 삼 남매는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늘 불안했다. 통근버스가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바깥에서 신나게 놀던 아이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기 아버지에게 뛰어가 반갑게 안겼었다. 반면 우리는 곧장 집으로...

문인협회 길 잃은 자

육중한 나무문을 열었다. 저 멀리 서 있던 어느 노승이 나에게 무어라 중국어로 외쳤다. 중국어를 모르는 나는 그것이 다시 나가라는 뜻인지 아니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몰라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노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중국어로 계속해서 나에게 외쳤다.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친절하게도 손을 소독하라는 뜻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허둥지둥 손을 소독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노란 조끼를 입은 봉사자 두어 명은 기념품 판매대에 서서 무언가를 포장하느라 바빠 보였다. 절의 내벽은 작은 불상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층층이 쌓인 불상들은 몇...

문인협회 겨울단상

다 벗어던진 나무의 진실, 나목은 생명의 속살은 간직한 채 화려한 외장은 지웠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은 더 이상 떨어뜨릴 낙엽이 없는 듯 그 소리마저 공허하다. 낙엽은 어느 사이 자취를 감추고 마지막 잔존마저 잊혀졌다. 나목에 어울리지 않게 추위를 피해 보려 중무장의 방한복으로 걷는 나의 겨울 거리는 을씨년스럽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하다. 모두 비우고 떠났는데 나는 아직도 비우지 못하고 삶의 끈을 붙잡고 있다니. 걸으면서 생각한다. 대화는 쉬 단절되고 이해와 용서는 멀리 있다. 마치 겨울 거리 만큼이나 인간의 일들은 겨울을 닮았다...

문인협회 겨울이 깊으면 봄은 멀지 않으리

미국에서의 첫 겨울, 남편의 공부로 해서 처음 해외에서 살게 되었다. 미국 중서부에 있는 도시, 미니애폴리스는 겨울이 아주 긴 곳이다. 그곳에서의 첫 해 겨울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10월이나 5월에 눈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이다. 하지만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은 3월이면 여기저기 봄을 알리는 꽃소식이 전해진다. 반년이 겨울이어서 계절 구분을 공사중이거나 아닌 것으로 구분한다는 우스갯소리가 가능한 날씨이다. 첫 해 겨울을 지나면서 2월이 되니, 눈은 하염없이 내렸다. 눈 폭풍에 길이 막히고 집이 무너지고, 온 세상은 소리가 끊어...

문인협회 추억의 온도

추워도 너무 춥다. 도움을 요청할 기력조차 없어 눈도 뜨지 못한 채 그저 오롯이 떨 뿐이다. 잠시 후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내 몸 위에 덮인 담요를 들추고 안쪽으로 무언가를 밀어 넣는다.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몇 장의 담요를 더 가져와 겹겹이 쌓은 뒤 네 귀퉁이를 내 몸 아래쪽으로 꼼꼼하게 넣어 준다. 그제서야 따뜻한 바람이 느껴진다. 따뜻해지는 피부아래로는 여전히 차가운 피가 도는 것 같지만 그래도 좀 낫다. 이제 견딜 만하다고 안도하는 사이 감긴 눈 위로 깜박깜박하던 불빛이 깜깜한 어둠으로 뒤덮인다.Adobe Stoc...

문인협회 수영복 입은 일기

누군가 묻는다. 일기와 수필의 차이점은 무엇이냐고. 누군가 대답한다. 일기는 나만 간직하고, 나만 읽을 수 있어 화장기 없는 민낯이거나 발가벗은 나체이어도 괜찮다. 하지만 수필은 남 앞에 서는 것이기에 나체의 일기에 수영복 정도 입혀 놓은 것이라고 했다.Adobe Stock어머니 양수에서 맨몸으로 살다, 세상에 태어나 강보에 싸이고, 배냇저고리에서 수의까지, 우리는 사는 동안 수많은 옷을 입는다. 내가 살면서 입었던 옷 중 제일 불편했던 것이 정장 차림이었다. 양복은 항상 나에게 그에 맞는 격식 치레를 요구하고, 나는 격식 있는 장...

문인협회 그리움을 키우는 공항 대합실

오랫동안 그리던 친구 부부를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다. 평일인데도 공항은 붐빈다. 떠나고 돌아오는 곳, 누군가를 맞이하고 보내는 곳. 공항 대합실은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아픔이, 떠남의 설렘과 귀향의 안도가 교차하는 곳이다. 내가 떠나는 것도 아닌데 항공노선의 목적지 이름만 봐도 심장이 쿵쿵거린다. 전광판에 있는 지명을 보며 예전에 여행했던 곳을 마음으로 거닐거나,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있는 영상을 떠올리다 보면 뜻밖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Adobe Stock이런저런 일로 여행하기 어려워 공항에 나온 지도 오래됐는데, 고국의 ...

문인협회 연장다운 연장

만두를 빚으려고 준비한 속이 큰 양푼에 가득 담겨 있었다.이 많은 걸 언제 다 하지?온 가족이 둘러앉아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동안, 나는 찬장 속 접시와 사발, 종지를 꺼내어 만두 찍는 도구를 만들기에 열중했다.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마침내 일종의 만두 틀을 완성했다. 모양은 일정하게 잘 나왔지만, 문제는 손으로 빚는 것보다 빠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설거지만 늘린다며 어머니와 아내의 타박을 들었고, 그 엉성한 만두 틀은 이후 명절마다 단골 웃음거리가 되었다.Adobe Stock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늘 효율적인 방법을 먼저 찾는 ...

문인협회 불청객과의 동거

어느 늦가을 날 이었다. 분주했던 하루를 희석시키는 잠결에 기대고 있을 무렵, 천장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숨을 죽였다. 같이 누우려던 온 몸의 세포가 일제히 일어나 한 곳으로 향했다.Adobe Stock어릴 때 살던 집, 더그매는 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달리기 시합을 하는지, 잔치를 벌이는지 밤이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아버지는 고양이 묘(描)자를 붓으로 써서 천장에 붙여 놓았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도 있고, 길 고양이 들도 들락거렸지만, 역량 발휘를 못하니 생각해 낸 대안이었던 것 같다. 살아있는 고양이도 힘을 못쓰는 ...

문인협회 어쩔 수가 없구나

고국에 계신 엄마와 통화하고 나서 조용히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오늘 엄마는, 늙은이가 된 후로는 도 닦는 심정으로 산다고 하셨다. 느닷없는 말이었다. 엄마에게 늙은이란, 아흔 넘은 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나이 드니 산다는 게 서운하고 섭섭한 일이더라만 그래도 어쩌겠느냐고도 했다. 힘들다, 서럽다, 외롭다, 쓸쓸하다 같은 익숙한 표현 대신에 왜 섭섭하다고 했을까. 그건 기대에 어그러져 실망스럽고 불만스러울 때 쓰는 단어다. 노년에 걸었던 기대와 바람이 헛되더라는 의미였을까.Adobe Stock어떤 날은 물 마시러 방에서 식탁까지 ...

문인협회 이제야 알겠다

생노병사, 생자필멸이 죽음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이라면 기운이 진하여 죽으니라는 죽음에 대한 성경의 묘사이다. 진리는 긴 설명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예, 아니요가 진리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때도 많다. 팔순에 와서 알게 되었다. 인생의 년수는 칠십, 혹 강건하면 팔십이라는 것 말이다. 요즘은 신문 부고란에 눈이 자주 간다. 저분은 몇 세에 별세했을까. 칠십 대도 많고 팔십 대도 많다. 팔십 대에 별세했다는 것은 건강하게 살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금은 백세시대라고 한다. 옛날에 비하면 평균수명이 많이 향상된 것 같다. 병실에 누워서 ...

문인협회 낭만에 대하여

사람이 떠난 옛집에 문패만 남은 것처럼, 토론토 중서부,블랙크릭과 에그링턴 아래 있는 길에 이정표가 서 있다. 포토그라피 드라이브그 길은 산업단지로 이어지는데 전체가 코닥 캐나다 소유였다. 생산시설과 사무실, 복지시설 등 모두 18채의 큰 건물이 군집한 코닥 마을 같은 곳이었다. 온타리오 내의 사진학과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견학했던 곳이라고 한다. 한 때는 토론토에서 가장 큰 기업이었다고 한다. 100년이 넘도록 전 세계 사진 업계를 지배했던 코닥은 이제 영원히 사라지고, 길 이름만 흔적으로 남았다. 그 길을 지나노라면 빛 바랜 앨범...

문인협회 그리고 하나의 미소

비가 내리는 봄 숲에서는 봄나물을 씻은 풀물 냄새가 난다.가늘게 내리는 비를 피하려고 우산을 받치는 건 성가신 일이라 그저 얇은 비옷을 입고 걸었다.Adobe Stock비가 내려서인가 숲에는 사람이 없었고 그이와 나만이 젖은 발자국을 만들며 걷고 있었다. 뒤돌아보니 발자국이 나를 따라오는 건지 내가 발자국을 따라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발자국은 내가 있는 곳까지 곧고 길게 뻗어있었다.그이가 등에 멘 가방에는 볶음밥이 있었지만 비를 피하며 먹는 일이 성가셔서였는지 시장기를 느끼지 못해서였는지 우리는 누구도 밥을 먹자고 말하지 않았다...

문인협회 아웃 오브 아프리카

영화 배경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차는 한적한 길로 접어든다. 희붐하던 안개가 걷히니 풍경이 또렷해지고 색상이 살아난다. 정오를 지나자 태양의 열기가 찌를 듯 따갑다. 차창 밖으로 녹음 짙은 나무들과 뭉게구름을 품에 안은 파란 하늘이 지나간다. 마치 아프리카의 하늘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다. 십 년도 더 전에 본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떠올린 건, 아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음악 때문일 것이다.ⓒ1985 - Universal Pictures조금만더 달리면 길 끝에 여주인공 카렌의 집이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