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협회 깨어진 한(恨)의 항아리

봄을 찾아 빛과 색을 자신에게 비춰보려 시도한 나들이였다. 이그니트 갤러리(Ignite Gallery)에 도착하니 김미현님이 반색하며 안내장을 건네주었다.한의 계량(The Measure of Han). 주제 발표, 졸업 작품 전시회라는데 제목이 특이하여 바짝 긴장되었다. 긴 복도를 지나 아래층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또 놀랐다. 표구한 그림 전시회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행위예술 전시회인 것이다.지난 이 년간 오로지 한 가지 주제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는 전시장은 행위에 사용된 소품 전시장과 주제를 위하여 야외와 실내에서의 예술 ...

문인협회 그 소리

1925년에 있었으니 99년 만에 돌아온 개기일식이다.다음은 2044년이라니, 20년 기다리면 된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인 데다 20년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일생일대의 사건이라고 할만하다. 더구나 온타리오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개기일식은 백이십 년 후에나 있을 것이라니 절호의 기회였다.예견이라도 한 듯이 40여 년 살던 런던을 떠나 마침 이곳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로 이사를 왔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개기일식 현상을 꼭 보고 싶다고 했더니 토론토에 사는 딸이 바쁜 시간을 내어 방문하였다...

문인협회 제2의 사계절

나의 계절은 겨울부터 시작되었다. 입춘을 바라보는 정월 그믐, 새 달력, 첫 장을 다 채운 평온한 밤, 흰 눈 덮인 동네엔 드문드문 박힌 외등만이 느긋하게 졸고 있었다.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는 살아 있을까, 가청 영역의 세상은 담담하고 조용하였다. 폭풍 전의 고요함. 일 순간 몰아친 회오리바람에 천지가 요동쳤다.지아비를 존재시키던 모든 것은 송두리째사라졌다. 그리고 나의 계절은 거기서 끝난 것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는 천문 이치의 순환은 한 순간에 멈추고 앞뒤 향방 없이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

문인협회 박사 학위

오래 전에 포기한 꿈이었다. 외부의 조건으로, 내부적 판단으로 두 번이나 외면하였던 꿈. 포기하였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있은 학위였다.박사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학문이나 전문 기술에 종사하던 사람에게 주는 벼슬이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박사란 대학이 전문 학술에 연구가 깊고 일정한 업적을 올렸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나 박사학위 논문 심사 등에 합격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학위, 또 그 학위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영어로는 PhD. Doctor of Philosophy 철학박사이다. 가장 널리 쉽게 접할 수 있는 철학이란 무엇일까 다시...

문인협회 브레시아(Brescia) 칼리지의 추억

캐나다의 유일한 여자대학 브레시아 칼리지가 폐쇄된다고 한다. 웨스턴 대학의 3개 부속 대학 중 하나인 브레시아 칼리지는 2024년 5월부터 웨스턴 대학에 흡수 통합되어 104년의 역사를 접는다는 것이다. 내 일생의 가장 귀한 충언과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요람이 없어지는것이다.토론토 스타에서 이 기사를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면서 옛일이 빠른 화면으로 지나갔다. 벌써 40여년 전의 일이다. 공부를 더 하고 학위를 얻으려는 계획이 사, 오년 지연되자 육신의 피로감과 함께 끝없는 심적 자괴감이 엄습하였다. 가사와 육아에만 얽매인 삶을 ...

문인협회 [수필] 친구가 없다

최근, 머리 안에 맴도는 문장이 하나 있다. 얼마 전 청춘 드라마 중에 나온 말이다. 그래서 네가 친구가 없는 거야! 이 말이 극 중 주인공을 괴로운 상념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나 역시 친구가 없다는 말에 갇혀있었다.친구가 없다. - 난 친구가 있는가? 없는 것도 같지만 난 친구가 필요 없는 삶을 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괜스레 친구의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고 나에겐 어떤 친구가 있었나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중학교 친구도 있었고, 고등학교 친구도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우정이 돈독했는데, 대학을 나만 홀로 서울로 가...

문인협회 숲 속 버스킹

관객은 청설모(주: 다람쥐의 일종)와 새들, 그리고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 뿐이다. 잎사귀를 모두 떨군 나뭇가지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늦가을을 알리고 있다. 블루투스(Bluetooth)의 반주에 맞춰 해금 소리가 숲속에 퍼진다.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악기에 마음이 꽂힌 것은 3년 전이었다. 소속된 단체에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계절도 마음도 황량한 겨울 한가운데 있었다. 해금의 슬픈 음색이 내 마음의 농도와 맞아서였을까. 영혼까지 빨려 들어간다는 게 그런 느낌일 것이다. 우연히 해금 연주곡을 듣게 되었는데 심장이 두근거리기...

문인협회 훈련소

심령 훈련으로 말씀 지혜 속살을 보며신체 훈련으로 생명 길 참여케 하시니,제1, 논산 훈련소그리움 태운 불꽃 어둠 자락 걷어내고수수 천년 화랑도 정신 새싹 돋아벼린 칼날로도 뚫지 못할 논산 땅 훈련세계를 밟고 일어날 푸른꿈 꽃으로 피어제2, 아라비아 훈련소붓을 들어 감추인 진리 본체 글로서 풀고홀로 광야에 앉아 보약처럼 우려져서살아서 삼층천 올라 맞보던 환상 삼켜사울아, 사울아 소리에 거듭난 참 사람제3, 순례길 훈련소나사렛 거친 바람에 야고보, 형 예수님 등에 업혀갈대 흔드는 세월 몸으로 하늘 체험하니형제의 연합이 아름답고 빛이 ...

문인협회 보이는 것이 먼저다

실내의 탁한 공기를 피해 보고자 바깥으로 나왔다. 마스크까지 벗고 나서 심호흡했다. 통쾌한 바람은 역시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새삼 신선한 공기의 소중함을 만나는가 했더니 매캐한 냄새가 스멀스멀 다가왔다.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피워대는 담배 연기가 내 잠시 동안의 사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여있는 이들이 마치 너는 담배 하나도 피울지 모르느냐면서 핀잔을 주는 듯하였다. 그런 눈총은 그런대로 넘길 만했다. 왕년의 헤비스모커 면모를 굳이 그들에게 드러낼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그들이 끽연 장소가 아닌 장소에서 흡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문인협회 명품녀

이탈리아 밀라노 광장에서 30분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오래 기다렸다는 듯 우리 관광 버스 안에 있던 몇 명의 젊은이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평소에 쇼핑이 테크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물건선택에 자신이 없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명품에 대해선 관심과 지식이 없는데다 가격마저 감당할 능력이 없으니, 당연히 쇼우 윈도우 앞에서 어슬렁댔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큰 쇼핑백을 들고 당당하게 나타난 여행동료들을 대하니 부럽고도 놀라웠다. 그런데 왜 그런지 그때부터 주눅이 들며 내 자신이 자꾸만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게 아닌가. 이 ...

문인협회 바람 부는 정원

바람 부는 정원 / 유명숙오랜만에 그대를 닮은 미소를 만났어요.더위는 목마른 세월을까맣게 태워 가는데홀로 복 많은 여자는 오롯이손녀 셋, 손자 둘 껴안고그대의 정원에서까르르 웃으며 피어나는코스모스처럼세상사, 친구 다 잊고바쁜 손놀림 속부서지는 젊음 아쉽고큰 숨 내쉬며 어깨 두드릴 때마파람 살며시볼 스쳐 가네요.그대가 다녀간 듯 시원한 순간 언젠가DNA 심어 놓은 정원의 바람이 될내 모습 그려 봅니다.기다림 / 유명숙숨 막히는 7월의 출산만남의 두근거림이저벅저벅 걸어 다니다산통의 처절한 소리에 질려쿵 하고 넘어지면아직, 조금 더해답 ...

문인협회 팥시루떡

토론토에서 남서쪽으로 400여킬로 떨어진 소도시 윈저.그 낯선곳에 아들이 첫집을 사서 이사가던 날,나는 정성스레 팥시루떡을 했다.내 생애 팥시루떡을 제물로 바칠거란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결혼하고 지금까지30년간, 7번의이사를 하면서 무언가를 소원해 본 적이 있었던가.단언컨대 없다너른 쟁반에 팥을 펼쳐놓고 알갱이 대부분과 다르게생겼거나 찌그러진것 그리고 갈라진 틈이 생긴 팥을 샅샅이 살피며 솎아낸다.두루두루 다른 팥과 잘 어울리는 순정한 팥만을 골라깨끗이 씻어 냄비에 앉힌다. 1시간여,낮은불에서 팥을 익히면 팥이 익으며 물...

문인협회 “2-1=0”이다

눈만 질끈 감으면 깜깜한 밤이 되듯 순식간에 뒤바뀐 궤도였다. 부연 시야 사이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흐르는 시간따라 웃는 해 얼굴이 점점 커지고 문턱에 감겨오는 봄바람의 따스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고요한 새벽, 변함없는 세상에 일종의 자괴감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정말 없을까. 아! 있다. 숲의 나무들, 기와집, 종달새 모두가 암회색뿐인 것을 그제야 발견하였다. 마음에 출렁이는 억울함의 단서를 찾아 지난 흔적을 뒤지는데 문득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대학시절, 문학작품 합평회였다. 한 남학생이 작품발표를 하였다. 1+1=4. 글...

문인협회 오수(午睡)- 빈센트반고흐의 <오수>에 바침

한가을 살찐 색깔들이우르르 떼 지어 몰려와 눕는다햇살 촘촘한 이 한낮엔들숨 날숨 온통 황금빛 이구나하늘의 뜻을 받들고땅의 관용을 믿는 지순한 당신고된 노동 끝에다디단* 오수에 드는구나휴식은하늘의 축복정직한 땀방울 위에 내리는숭고한 트로피당신의 소박한 꿈 날개가조용조용 청잣빛 하늘을 두드리나니그 꿈길 부디 종교처럼 깊고비둘기 눈빛처럼 고요하기를!*다디단: 매우 달다라는 뜻이며 원형은 다디달다 이다.안봉자 (bongjaahn@gmail.com)*1970년캐나다이민.*2003년밴쿠버한인문협&lt;신춘문예&gt;수필등단; 2004년월간순수...

문인협회 친할머니

기억은 당시의 성숙 정도와 가치관에 따라 일방적이거나 주관적이기 쉽다. 그래서인지 같은 기억이라도 때론 부정적으로 때론 긍정적으로 변화하며 거듭나는 것 같다.​내게 각인된 친할머니의 모습은 인자하지 않고 편애가 심한 부정적 이미지였다. 나이 마흔에 삼대독자인 아버지를 낳았으니 내 인생에서 함께한 할머니 나이대는 대략 칠십 초반에서 팔십 중반이었을 터이다. 대체로 나이가 들면 억지로 미소 짓지 않고서는 주름살 패인 얼굴 탓에 화난 표정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웃는 적이 거의 없었던 할머니는 늘 무뚝뚝하고 화가 난 모습이었다. 기다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