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에도 아기는 젊은 엄마의 아기가 아닌 좀 전, 하염없이 창 밖 구름을 바라보던 중년의 그 여인에게 안겼던 그 아기였다. 아기는 안긴 채 몸을 뒤틀며 울고 여인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어디 아픈가요, 아기가? 나는 뜻밖의 광경에 말투를 가다듬었다.낯설어서인지 잠을 이루지 못하네요. 그러고 보니 아기는 아기 전용 좌석도 없이 여태 여인이 두른 띠에 묶여 있었다. 세상에, 눕고 싶었나보다. 어른에게도 좁은 공간에다 몸을 구겨 넣은 채 다니는 장거리 여행은 고행이 아닌가. 나는 머릿속 가득 차 있던 짜증을 나도 모르게 숨기며 어...
비행기는 가까스로 잠잠해졌는데 아기 울음소리는 여전하다. 아기는 좀 전과는 달리 악을 쓰며 운다. 잠투정이 아니라 어딘가 불편해 우는 소리 같다. 기저귀가 젖은 것일까? 잠을 청하려 하면 그때마다 흔들어 깨우는 울음소리에 몹시 짜증이 난다. 아니 아기 엄마에게 내는 짜증이다. 장거리 여행에 긴장으로 더 피곤할 승객들을 생각해 아기의 엄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기가 잠잠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올올이 곤두선 신경을 쓰다듬으려 남은 와인을 플라스틱 잔에다 부어 벌컥벌컥 몇 모금 마신다. 아기가 울든 비행기가 흔들리든 내 신경을 금방 ...
나는 그 아기의 행방을 모르고 행방은커녕 열 달을 품고 있었어도 그 아기가 남아인지 여아인지조차도 모른다. 제대로 잘 자랐다면 저를 잉태했던 그때의 내 나이만 할 그 아이, 그러나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그 아기에게 내가 어떻게 어머니를 이해시킬 수 있으며 나는 기회조차도 가질 수 없었던 이별의 의식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곧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음을 의미했고 그 아기에게 나는 영원한 죄인으로 남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알리는 조급하기만 하다. 그는 아마도 내가 도착할 그 비행장에 와 기다리고 있으...
모르는 것이 낫다. 낯익히면 못 뗀다.그때 혼절에서 깨어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잠시 잊고 있었을 때 어머니는 내 침대 머리맡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단칼에 자르는 것 같은 매운 말보다 내가 왜 소독 냄새 물씬한 그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지방의 병원에서 겪은 졸음과 함께 쏟아지던 통증을 이기지 못해 혼절을 했던가? 지방을 찾았던 것은 아마도 주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리라. 아랫도리를 생으로 찢는 것 같던 아픔보다는 터져 버릴 것 같던 배의 통증이 견디기 힘...
비행기는 마치 제자리에 멈춰 있는 듯하다. 나는 불편했던 몸을 조금 움직인 후 자리로 돌아왔다. 아랍계로 짐작이 되는 옆 좌석의 남자는 랩탑으로 뭔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랩탑 화면에는 나는 짐작도 할 수 없는 그래프며 복잡한 숫자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눈이 깊고 짙은 눈 섶을 한 옆 남자는 내가 자리를 떠났다 돌아와도 화면에다 골몰하느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일하고 있다, 몇 시간 비행할 동안 내가 옆 좌석의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엔지니어일까?나는 문득 알리를 생각한다. 내 연구실 책임자로 있는 레바논 ...
비행기는 어느 듯 미동 없이 날고 있다. 벨트 사인이 사라지자 사람들의 입에서 가벼운 안도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긴장에서 놓여나는 소리이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더러는 잠을 자든가 승무원에게 마실 것도 청하며 한결 안락한 분위기가 되었다. 다리를 제대로 펼 수 없는 좁은 공간에다 몸을 구겨 넣은 채 몇 시간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뒤틀리고 다리가 저렸다. 나는 화장실도 다녀올 겸 자리에서 일어나 일부러 좀 걸어 비행기 꼬리 즈음에 있는 화장실로 나선다. 화장실 앞 작은 공간에는 몇몇의 사람이 선 채 다리를 일렁이...
눈을 붙이려 하면 마치 선잠을 깨우듯 비행기는 흔들린다. 장거리 비행에는 웬만큼 익숙해져 있음에도 키질하듯 들까부는 흔들림은 여전히 두렵다. 앞쪽의 대형 티브이 스크린 속의 작은 비행기는 여태 베링 해협 상공을 향해 날고 있다. 아시아 대륙과 북미 대륙 사이의 태평양 북단의 바다. 그러니까 비행기는 이미 두 대륙의 경계를 향해 바다 위를 날고 있는 셈이다. 인천 공항을 이륙할 때의 가슴 아리던 증상이 다시 도지는 것 같다. 아마도 또 다른 경계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여행을 할 때마다 여러 단계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 특히 이...
미국땅에살던애나는가끔전화를해아버지와대화를나눴다.아버지연세가그렇게많은줄몰랐어요.아프지마세요,아버지.애나는전화를할때마다그렇게말하다가아버지,죽지마세요.하며늘울먹이면서전화를끊었다.애나와통화를마친아버지,제임스힐스목사는말했다,애나는전화할때마다죽지말라고하네.라고.아버지가연세많아죽을까걱정하던애나가몇년전에저먼저세상을떠났다,심장마비로.그때그녀의나이예순초반이었다.이미건강을잃어가던중이던아버지제임스힐스목사는나더러죽지말라던우리애나가나먼저죽다니..하면서울었다.그애나,그녀는내가늦게제임스힐스목사와가정을이루기훨씬전그녀의나이,7살에코스타리카에서입양되었다.이미3남1녀...
25. 콘도르를 만나다 드디어 마이클과 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페루에 가는 비행기다. 얼마 만인가? 일곱 살 때 떠난 고국에 남편과 함께 가는 것이다. 어머니와 가기로 한 여행이었다. 나와 페루에 가고 싶다고 하신 어머니의 말은 나와 마이클을 보내기 위한 작전이었을까?그렇다면 어머니의 작전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진 셈이다.25. 콘도르를 만나다 드디어 마이클과 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페루에 가는 비행기다. 얼마 만인가? 일곱 살 때 떠난 고국에 남편과 함께 가는 것이다. 어머니와 가기로 한 여행이었다. 나와 페루에 가고 싶다고 하...
24. 샬 위 댄스 마이클은 레스토랑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나! 마이클이 자동차에 내리던 날 대뜸 안고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입을 맞추며 기꺼워했다. 그는 그렇게 깍듯하던 절제된 행동은 다 잊은 것 같았다. 이제야말로 그도 내가 아는 내 남편 마이클이었다.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냉랭하던 기운이 사라지자 우리가 마치 열애 중인 것 같았다. 시아버지로부터 물러 받은 와이너리와 함께 마이클이 시작한 레스토랑은 그의 열정과 애정을 기울이는 비즈니스였다. 그러나 마이클과 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
23. 반 전 짧은 겨울 방학을 마친 브라이언의 두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했다. 나는 두 아이들을 버스 정류장(Bus Shelter)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함께 집을 나섰다. 아이들에게 추운 날씨는 겨울의 특징일 뿐이었다. 눈길에 푹푹 빠지면서도 서로 장난치며 까르르 웃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뛰기도 하는 두 아이의 가방을 받아 양 쪽 팔에다 걸고는 천천히 따라 걸었다. 그러고 보니 캐나다 부모들은 자녀들 양육에 비교적 대범한 것 같았다. 길고 추운 겨울에도 아이들 몸을 너무 감싸지 않고 키웠다. 성탄과 신년 휴일이 포함된 두 주간의 ...
22. 오 해 농장에 사람들이 보이면 봄의 시작이었고 그들이 떠나면 가을이었다. 이른 봄에 자메이카에서 멕시코에서 온 그들은 농원을 누비며 시기에 따라 할 일을 알아서 했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이미 여러 해 동안 그 분야의 일을 한, 전문가였다. 디에고가 떠난 후 집안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지 오래였어도 어머니는 건강하셨을 때처럼 꽃 가꾸는 일만큼은 남의 손에 맡기지 않았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였고 그것은 어머니가 가장 잘 하시는 일이기도 했다. 올해도 어머니의 손과 늦여름부터 내 손을 보탠 정원은 늦가을까지 꽃으로 화사하...
21. 페루를 그리다병원에서 나온 이후 나는 어머니 집에서 머물고 있다.내가 다시 마이클이 있는 집엘 가게 될지 나는 모른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서로 떨어져 지내며 서로에 대해, 우리의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내린 벌이다. 집에 가면 많이 쉬자, 애나. 그 날 병원에서 내가 집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마이클은 날 데리고 집으로 갈 준비를 했었다. 그것은 유산을 한 이유와 그것으로 인한 내 심정과 상관없던, 당연한 일이었다. 애나는 내가 데려가겠네, 마이클. 그런데 수아와 함께 오신 어...
20. 벌 받다 나는 집으로 왔다. 추리 하우스에 오를 수 없는 겨울이면 창밖 온타리오 호수를 바라보며 삼뽀냐를 불었던 어머니의 집, 내 방이었다. 토해내야 할 말은 찼지만 나는 속에다 가뒀다. 입을 다무니 무슨 일이 있었던지 알 리 없는 식구들은 내 주위를 맴돌며 애만 태웠다. 다만 마이클의 음주를 차마 부모님에게 말하지 못했을 브라이언만이 그 밤에 날 홀로 남겨둔 탓이라며 자책을 할 것 같았다. 네 탓 아니야, 브라이언. 그 말은 하고 싶은데 나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는 일조차도 하기 싫었다. 말을 한들 달라질 것이 없었다. 사...
19. 그리고 카오스 몇 날 째 나른하고 의욕이 없었다. 마이클이 출근을 하고나면 다시 침대로 들어가 누워있었다. 늦여름에 찾아온 감기몸살 같았다. 더운 차를 마시고 자리에 누웠는데 문득 어머니가 만드신 칠리(Chili)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다진 고기와 야채, 붉은 강낭콩에다 칠리를 넣어 걸쭉하게 끓인 음식이었다. 느끼하지 않은 칠리 한 그릇 먹으면 기운이 날 것 같았다. 느지막이 일어나 팀 홀튼으로 갔다. 커피로 머리를 개운하게 하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칠리를 먹고 싶었다. 어머니가 만드신 것과 맛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