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24)

그 마이클이 날 만나자고 해 나는 이곳에 와 있고 그가 먼저 와 있다면 어딘가 앉아 있을 텐데 나는 살피지 않았다. 저가 날 알아보고 찾아오면 모를까 내가 휘 둘러 찾아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웨이터가 갖다 놓은 커피에다 우유와 설탕까지 넣어 한 모금 마셨다. 마이클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시킨 커피가 오도록, 우유를 넣고 설탕을 넣어 젓고 한 모금 마실 때까지 여기저기 앉은 사람 중에 아무도 날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수영을 마친 후 가끔 어머니와 이 라운지를 찾을 때가 있었다. 애나야, 난...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23)

10. 그를 만나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식구들은 파이어 플레이스를 중심으로 자주 한 자리에 모였다. 얼마나 많은 눈이 와 길을 덮든, 얼마나 차고 모진 삭풍이 호수를 훑으며 불어오든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면 따뜻하고 화사했다. 어머니는 뜨개질로 늘 손을 움직이시고 아버지에게는 새로운 낙이 생겼다. 가끔 이안을 안고 창밖에 끝없이 펼쳐진 눈 덮인 포도농원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품에 안긴 아기 이안에게 아버지는 말하셨다, 이안, 보아라, 저 포도농원을. 네 것이란다. 라고.끝 간 데 없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선 포도농원을 손자에게 보여주...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22)

9. 디에고는 가고 여덟 시간의 진통 끝에 드디어 수아는 남자 아기를 출산했다. 오랜만에 집안에 아기 울음소리가 있자 아버지는 종일 허허.. 웃으셨고 어머니는 마치 한 번도 아기를 키워본 적 없는 듯 이안이 배가 고픈가 보다. 라며 위층을 올려다보며 애를 태우셨다. 아기는 기저귀가 젖어도 울 수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잊어버리신 것 같았다. 아기가 정말 배가 고파 울어도 수아는 퉁퉁 불은 가슴을 하고도 행동이 느릴 수밖에 없으니 동동거리는 사람은 브라이언이었다. 아빠노릇, 쉽지 않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브라이언은 겸연쩍은 웃음을 ...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21)

오늘 모임은 어땠소? 애나도 갔다면서? 저녁 식탁을 물린 자리에서 아버지가 여상하게 어머니의 하루 일과를 물으셨다. 아버지는 어쩌면 부인들의 모임에서 오갔을, 들을 만한 새로운 정보라도 있을까 하고 물으셨을 것이었다. 아, 글쎄, 미세스 길모어가 마이클과 애나를 중매하면 어떨까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하루 일과로 모임의 얘기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어서 나는 듣고만 있었다. 파울의 둘째 말이요? 뜻밖이라는 듯 아버지가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돼요, 엄마, 마이클은! 그 때였다, 마치 어렸을 적에 마이클이 날 놀리고 있었을 ...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20)

다정한 대화와 웃음소리가 있는 일상의 평화는 그렇게 한여름 햇살처럼 집안에 충만했다. 오늘 모임에 애나가 나랑 가줄 수 있겠니? 아침 식탁에서 어머니가 날 바라보며 말하셨다. 어머니의 모임엔 주로 손수 운전하시거나 나도 가끔 운전으로 어머니와 동행을 했다. 부인들의 모임이라 조심스럽고 재미는 없지만 나는 기꺼이 어머니를 따랐다. 운전을 이유로 모임에 동참하노라면 부인들 모임에서 하고 있는 봉사활동 등, 그 사회에 대한 소소한 정보들을 어깨너머로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인들이 주고받는 정보는 남편들의 와이너리 운영에 직 간접으로...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19)

8. 수다에 휘둘려 아직 봄이라 부르고 싶은데 여름이 무례한 점령군처럼 봄을 젖히고 자꾸만 앞질러 땅을 밟으려 했다. 언제 긴 겨울이, 발목을 덮은 눈이 있었으며 언제 나목의 시간이 있었느냐는 듯이 성급한 여름은 정오의 열기를 동원해 움츠리고 있던 것들을 충동질했다, 어서 꽃 피고 어서 잎 무성하고 어서 열매 맺으라고. 잔디는 유난히 더위를 탔다. 한겨울 눈 속에서도 초록인 잔디가 여름 더위엔 예민했다. 며칠 가물면 누렇게 마르다가 한줄기 소나기에 금방 초록으로 돌아왔다. 겨울의 퇴장을 가장 먼저 알리는 소리 중의 하나가 잔디 깎...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18)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두 사람 사랑하는 사이라고. 지난겨울 비달 수확 때 함께한 사람들이 한 말이에요. 당연히 소문이겠지만 누나를 위해 조심했어야죠, 브라이언.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싶었던지 디에고가 브라이언을 향해 소문에 대해 말했다. 전혀 예상치 않은 디에고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 날 눈이 겹겹이 쌓였던 그 신 새벽의 농장에서 브라이언과 이별을 한 그 순간이 앞서가며 포도를 수확하던 인부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되어 디에고의 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한 겨울의 포도 수확은 자신...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17)

오늘은 일요일이라 농장일이 없어서인지 디에고가 앞뒤 뜰에서 잔디 깎기 기계(Ride On Lawn Mower)를 운전하고 있었다. 기온이 점점 올라갈수록 잔디가 더 왕성하게 자라서 디에고는 농장 일이 없는 주말에는 꼭 잔디 기계를 몰고 다녔다. 어머니는 수아를 데리고 아기 용품을 사러 가셨고 아버지와 브라이언은 와이너리에 갔다. 미안하다, 애나야 우리끼리 가서. 이담엔 너도 가자. 어머니는 행여 내가 서운해 할까 마음 쓰다듬는 일도 잊지 않으셨다. 어머니와 수아가 외출한 후 모처럼 혼자가 된 나는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펼쳐들...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16)

7. 소문이 있었네 집은, 브라이언이 고른 태교를 위한 잔잔한 음악과 수아의 건강과 입맛을 위한 음식 냄새, 그리고 어머니의 수다와 아버지의 너털웃음으로 넘쳤다. 적적하던 집안에다 브라이언과 수아가 화사한 웃음소리와 흐뭇한 기다림의 꾸러미를 풀어놓은 것 같았다. 브라이언과 아버지가 매장으로 출근하고 나면 어머니는 수아와 날 앞에 두고 이야기 나누기를 즐겨하셨다. 딸과 며느리를 앞에다 두고 있을 때는 어머니가 오히려 소녀 같았다. 그 때 배로 부모님과 영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오던 중이었어. 내가 배 멀미를 심하게 했단다. 어머니 나...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15)

떠난다는 말로 나는 지금 브라이언을 고문하고 있을까?내 고통만큼 너도 겪어봐라, 란 심정으로 그렇게 브라이언을 괴롭게 하고 있을까?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가 브라이언이므로.알았어, 안 그럴게, 브라이언. 그것이 브라이이언의 떼였으므로 나는 또 마치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안 그런다며 고개부터 흔들었다. 마치 오래 전 그 때의 브라이언과 나 같았다. 애나! 브라이언이 급히 장갑을 벗었다. 마치 옷을 벗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언 맨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브라이언의 손이 찬지 내 얼굴이 찬지 ...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14)

브라이언과 나는 인부들 틈에서 어둔해지는 손을 자꾸 움직여 포도를 따 나무통에다 담았다. 춥지, 애나? 참을 만 해. 나는 브라이언의 입김을 느끼며 포도송이에다 눈길을 주고 있었다. 괜찮겠어? 전엔 브라이언과 내가 추울수록 얼어서 어둔한 발음으로 계속 뭔가를 말하며 포도를 땄어도 아무 일 없었는데 브라이언이 날 염려했다. 처음 아니잖아. 난 괜찮아, 브라이언. 그러나 나는 처음 아니어서 내가 춥지 않다며 둘러댔다. 나는 몹시 사무적이었다. 브라이언이 날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모른 척했다. 어느 한 순간 내가 고개를 돌렸는...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13)

6. 그 새벽의 이별 식 온타리오의 긴 겨울이 깊어갔다.호수를 훑어온 삭풍에 땅에다 뿌리 내린 산 것들이 부러질 듯 휘둘릴 때에도 유독 꼿꼿한 무리가 있었다. 모두가 개체적일 때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며 잔가지 하나도 방치하지 않고 팔에 팔을 껴 결속한 행렬, 바로 포도나무였다. 매일 칼바람이 휘몰아치고 눈이 무릎을 덮어도 포도나무는 앙칼지게 버텼다.어두운 겨울 하늘 빛깔을 한 온타리오 호수는 아무리 눈이 와도 희어질 줄 몰랐다. 바람이 심한 날, 멀리서부터 물이 켜켜로 몰려와 집 앞 언덕을 후려친 후 그 자리에서 쓰러...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12)

브라이언이 왜 세헤라자데를 포기했을까?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가 수아를 재촉하셨다.브라이언이 말했어요, 목숨 건 게임처럼 하는 건 사랑이 아니죠. 난 내 방법으로 하려고요, 하고.어머니의 두 눈이 호기심과 기꺼움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난 내 방법으로...어머니의 두 눈이 기꺼움으로 반짝일 때 나는 브라이언이 했다는 그 말에 붙잡혀 있었다. 수아를 향한 브라이언 방법의 사랑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뒤틀리고 있던 내 속에 불길이 붙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수아는 지금 날 시험하고 있는 걸까, 의도적으로?마치, 내 속의 타다만 눈물 젖...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11)

수아의 깊은 눈은 이제 어머니가 더 묻지 않아도 다 들려줄 준비가 되었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수업시간을 기다렸어요, 브라이언이 사람들을 웃게 했거든요. 사람을 잘 웃게 만드는 브라이언의 어떤 점을 수아도 이미 그 때 알았나 보았다. 브라이언 때문에 가장 많이 웃었던 내 속에선 나만 품고 있던 브라이언의 어떤 점을 마치 수아가 가로채기라도 한 듯 발끈 질투심이 일었다.브라이언과 처음 커피를 나눈 곳은 학원 건물에 있는 카페였어요.수아의 눈은 이제 그 때, 사랑의 시작의 현장에 가 있었다. 늘 고요히 깊기만 하더니 이제는 반짝이며 일...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10)

브라이언은 지하실을 싫어했다. 아니, 아주 두려워했다. 브라이언의 어두운 기억, 유괴의 악몽 때문이었다.그런데 그 때까지 지하실은 온 가족이 즐기던 오락 공간이었다.아버지와 어머니가 와인을 즐기시는 바가 있고 티브이와 음악 감상을 할 수 있었는가 하면 브라이언이 갖고 놀던 장난감이 있어서 지하실은 식구 누구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쉬던, 소중한 공간이었다.지하실은 실은 구조상으로는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온타리오 호수가 정면으로 눈에 들어오는 뒤뜰과 연결되었고 여름엔 호수를 바라보며 와인을 즐기고 바비큐를 즐기는 지상의 위치였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