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9)

그 날은 햇살이 유난히 화사하니 좋았단다. 다들 긴 겨울에 시달릴 대로 시달렸었어.브라이언이 뜰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기에 나는 뒤뜰에서 빨래를 늘다가 햇살이 좋아서 앞뜰에 브라이언이 혼자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햇볕바라기를 한 것이 발단이었지. 햇볕을 쬐다가 문득 브라이언이 혼자 자전거를 탄다는 생각을 했어. 좀 놀아줘야지 하며 앞뜰로 갔더니 놀고 있어야 할 브라이언은 없고 자전거만 넘어져 있는 거야. 브라이언, 브라이언, 하고 집안을 찾고 포도밭 고랑을 오가며 들여다봐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어. 눈앞이 캄캄했단다. 겨...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8)

5. 고문과 희나리브라이언은 어서 삼년간의 부재의 공백을 채워야 한다는 듯 와이너리 일에만 몰입했다. 내 눈에 브라이언은 과거를 두지 않은 사람 같았다.우물 같은 깊은 눈을 한 수아는 낯섦 때문인지 발걸음이며 말소리가 조심스럽고 고요해서 마치 그림자 같았다. 그러나 고요한 채 수아는 내게 많은 말을 하는 것도 같았다.수아가 보이는 모호한 눈빛은 친하고 싶다는 의미 같기도 하고, 나 다 알아요, 브라이언과 당신 관계, 라는 의미 같기도 했다.나는 어렸던 그 때부터 브라이언과 키워온 그 깊고 오래된 감정의 뿌리를 뽑아내려, 그리고 언제...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7)

그 날도 나는 추리 하우스에서 삼뽀냐를 불고 있었다. 열어둔 창으로 온타리오 호수 면을 스쳐온 늦봄 바람이 불어들었고 멀리 호수 끝자락에 시엔 타워와 고층 건물의 실루엣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 토론토의 날씨도 청명한 것 같았다.마리오 오빠가 연주하던 외로운 양치기를 연주하며 오빠를 생각하고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거리의 타국으로 날아온 지 이미 오래였고 오빠는 그 땅 감옥에서, 아버지는 홀로 치차에 취해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은 지도 오래였다.그렇게 오빠와 아버지를 생각하며 외로운 ...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6)

드디어 우리 식구 모두 한 자리에 앉았구나.테이블 가운데 자리 한, 디너를 위한 촛불이 은은했다. 브라이언이 좋아하는 더운 음식이 담긴 은 식기의 식탁 격조가 약간은 수다로 번지려는 모처럼의 대화와 어우러져 차라리 유쾌했다. 아버지가 먼저 와인 잔을 높이 치켜들면서 집에 잘 왔다, 브라이언, 수아, 환영한다!라고 하자 어머니와 내가 따라하면서 서로 잔을 부딪었고 식사는 시작되었다. 내 눈에 수아는 많이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결혼식에 못 가 서운했는데 오붓하니 이 방법도 괜찮구나.어머니가 와인 잔을 들며 서운했던 속내를 슬쩍 드러...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5)

우리 셋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발딱 자리서 일어났다. 소리 나게 또는 급히 약간 엎지르도록 경황없이 찻잔을 놓으며 아버지가 먼저 현관으로 가셨고 어머니는 뒤따랐다. 어머니 아버지가 먼저 브라이언 내외를 맞으셔야 했으므로 나는 몇 발자국 떨어져 서 있었다. 심장이 튕겨져 나올 것만 같았다.브라이언, 수아!오, 브라이언!아버지와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브라이언이 활짝 웃고 있었다.브라이언!내가 혼잣말로 브라이언을 불렀다. 그리웠던 얼굴이었다.아버지, 엄마!큰 가방들은 바깥에 세워둔 채 수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 온 브라이언이 먼...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4)

어렸던 그 때, 처음 만난 브라이언 가족과 페루의 아버지가 날 두고 무슨 말이 오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설령 알았다 해도 생각을 드러낼 나이가 아니던 나는 그렇게 어른들이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의 의논에 다만 마리오 오빠는 아버지에게 화를 냈다가 울기를 되풀이 했었다. 처음 만난 한 해 후에 브라이언 가족을 따라 캐나다로 오기까지 어렸던 내 눈에 바뀐 사람은 마리오 오빠였다.오빠는 울면서 삼뽀냐를 불었고 집에 오면 아버지처럼 치차를 마셨다. 그리고 거칠어졌다.네가 마마니를 책임질 거냐, 마리오?마마니는 내가 책임...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3)

브라이언과 하나로 묶여버리고 싶은 오래 묵은 감정은 숨긴 채 한 내 말에 브라이언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니, 하는 눈을 하고 날 바라보던 브라이언의 그 표정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더 냉정하고 단호해야 했다. 브라이언의 언사는 어머니 앞에서 소리로 드러난 순간 너무나 억지스럽고 무례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미 약속되어 그렇게 살고 있던 관계를 뿌리부터 부정하고 뒤집는 말의 테러였기 때문이다.이러지 않고는 어머니를 안심하시게 할, 브라이언의 감정을 누르고 무엇보다도 브라이언과 다르지...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2)

노! 그러지 마라. 높지는 않았어.그 경황에도 어머니는 당신이 보셨을 장면은 부인하고 싶으신 것 같았다. 크게 다치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어머니가 일어나 앉으며 흐트러진 치맛자락으로 드러난 종아리부터 가리셨다.브라이언과 내가 부축해 자리에 누우시게 한 후 따뜻한 차를 만들었다.넌 내 딸이다. 브라이언 누나다, 애나야.어머니가 차를 들고 간 내 손을 잡으셨다. 침대 옆에 선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하는, 너무나 당연한 어머니의 말이 내 가슴에다 아릿한 핏빛 금을 그으며 지나갔다. 나는 어머니를 바로 바라볼 수가...

김외숙의 연재소설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1)

마침내, 물비린내를 실은 바람이 온타리오 호수로부터 불어오기 시작했다.바람결이 한결 순해지자 제 나라에서 겨울을 보내고 돌아 온 인부들은 포도농장 일을 다시 시작했다.아버지는 긴 추위에 시달린 추리 하우스며 사다리의 안전부터 점검하셨다. 브라이언과 내가 어렸던 그 때, 집 뒤뜰의 늙은 오크나무 위에다 손수 지어 올리신 작은 집이었다. 브라이언과 나의 재잘대던 말소리와 웃음소리, 책 읽던 소리와 어설픈 내 삼뽀냐 연주 소리, 그리고 낯설던 브라이언의 변성기의 목소리와 수줍음을 타기 시작한 내 목소리, 좀 더 세련된 나의 삼뽀냐 소리까...

김외숙의 연재소설 김외숙 중편소설 '직지를 찾다' (16)

직지가 어차피 프랑스에 가 있는 한 이 일은 그것을 누가 어디서 소장하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당신의 선조가 세상에서 처음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역사 발전에 이바지했고 그것을 세상이 더 많이 알도록 하는데 관점을 둬야 한다고 생각해. 한국에서든 프랑스에서든 그 긴 세월을 이겨낸 직지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 아니겠어?그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이미 언쟁의 전의를 상실한 나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듣고 보니 그의 사고는 나보다 합리적이었다. 어쩔 수 없는 ...

김외숙의 연재소설 김외숙 중편소설 '직지를 찾다' (15)

인쇄박물관 하나로 내가 행운을 느끼다니 이렇게 나는 동화되는 것일까? 내 마음은 이렇게 날개를 접고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일까?운전을 하며 나는 내 마음의 향방을 다시 집어보고 있었다.그런데 두 번째의 박물관 방문을 다녀온 나는 한 가지 궁금증을 가졌다. 자기 것을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저렇게 당당하게 자랑하고 보관하는데 프랑스는 왜 남의 물건을 자기 것인 냥 자신들의 도서관에 소장하는가 하는 것이었다.얼마 전에 미국이 기원전 5세기의 에트루리아 꽃병 등 25점의 유물을 이탈리아에 돌려줬다는 뉴스를 읽었어. 미국 박물관과 개인 소장자...

김외숙의 연재소설 김외숙 중편소설 '직지를 찾다' (14)

유 기자에게는 주저한 것을 푸른 눈에게 당신이 나의 직지라고 고백을 한 것은될 대로 되라는, 유 기자에게 또는 내 인생에게 한 어깃장이었을 것이다. 진지했던삶으로부터 이미 된통 뒤통수를 얻어맞은 터였으므로 더 이상 진지하기 싫었다. 그냥, 더 강하게 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유 기자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붙잡아라. 란 의미였을 것이다.옴짝할 수 없도록 유 기자가 날 붙잡는다면 그대로 주저앉을 참이었다, 눈앞에 없는 푸른 눈의 마음의 댐이 범람을 하던, 그래서 폭포에 점프를...

김외숙의 연재소설 김외숙 중편소설 '직지를 찾다' (13)

그럼 프랑스로 가지 뭐. 덕분에 유럽 여행도 다시 하고.그가 심플하게 결론을 지었다. 그것이 누구 것이었고 어디에 있든 누구나 쉽게접할 수 있으면 된다, 라는 것이 그의 사고였다. 내 것은 내 땅에, 라는 것은 나의사고였다. 그와 내가 하나로 어우러지기 힘들었던, 아니 그에게 내가 쉬이 마음의뿌리를 내릴 수가 없던 하나의 단적인 예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금방 그럼 프랑스로 가지 뭐. 라고 심플하게 반응했어도 나는 평소처럼 날렵하게 대꾸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머리를 돌리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내가 한 때 그 직지 란 것에 목말라...

김외숙의 연재소설 김외숙 중편소설 '직지를 찾다' (12)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무지한 거야, 엄연히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의것을 모르다니.세계의 최초의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그것은 그들의무지 때문만이 아닌 우리의 것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우리 탓인 것 같았다. 우리것임에도 우리 집에 간수하지 못하고 남의 집에 두도록 할 수밖에 없는 버젓하지못한 이 입장은 또 얼마 난감하게 하는가? 얼마든지 당당해 하고 자랑스러워해도좋을 일 아닌가, 세계 최초로 우리 손으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까지 두고 있다는사실은. 그러함에도 엉뚱한 사람의 발명품을 최초의 것으로 오인하...

김외숙의 연재소설 김외숙 중편소설 '직지를 찾다' (11)

그런데 정확한 년도를 내세운 내 말에 청년은 순순히 자신의 무지를 인정했고 마치 내게 한 잘못인 듯 고개까지 숙였다.우리 선조는 첫 인쇄기로 신문을 발행했는데 코리아의 그 인쇄기로는 무엇을 인쇄했나요?한 번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 청년은 오히려 호기심을 보였다. 순순히 인정하고알기 위해 적극적으로 묻는 청년의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백운화상 초록 불조직지심체요철, 곧 줄여서 직지라고 하는 책이에요.직지,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요?푸른 눈의 청년은 은근히 집요했다. 자신이 아는 것을 내게 설명을 해야 할 본분을 잊고 오히려 내게 우리의 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