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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에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Sep 07 2023 05:14 AM
매해 기상이변의 현상을 매스컴을 통해 보고 들었지만 실감하지는 못했다.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어떠하다고 했어도, 기온이 높아져 더위에 사람들이 얼마나 시달린다고 했어도 내가 사는 동네에 이변이 없었으니 세상 어딘가 남의 일이란 생각이 솔직히 없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이 미욱하니 올여름, 지난 7월부터 한 주에 서너 번씩 집중적으로 쏟아지던 폭우를 경험하며, 비 없는 무더위, 숨이 턱턱 막혀야 할 여름에 시도 때도 없이 퍼붓던 비로
마침내 내 집의 지하에 물이 스며들면서야 기상이변이 내 일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틀이 멀다, 하고 비, 그것도 폭우가 쏟아지니 서재에 물이 스며 책장 아래도 흘렀는데 서재엔 책, 5천 권이 있었다. 비가 퍼부을 때마다 나는 서재 바닥에 고이던 물 닦아내기에 바빴고 비는 8월까지 이어졌고 그러다 안 돼서 이웃에게 걱정했더니 보험회사에서 뭔가를 해 줄 거라고 했다.
보험회사를 통해 서재에 물이 드는 이유를 찾고 고치고 청소까지 하게 되었는데 제일 먼저 할 일이 책 오천 권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서재의 모든 책장은 멜빌 듀이의 도서분류법에 따라 일련의 고유번호를 갖고 있었는데 필요한 책이 있을 땐 주제에 따라 컴퓨터에 입력된 고유번호를 찾으면 오천 권 중에서 쉽게 읽을 책을 찾을 수 있었다.
내 짝의 서재이지만 내게도 아련한 추억이 있다.
스무 해 전에 북미주 몇 곳을 여행하던 중에 우연히 제임스 힐스 목사를 만났는데, 그는 이튿날 나를 집으로 초대했고 베이스먼트에 있던 그의 서재로 데려갔다.
규모로 압도하던 그의 개인 도서관에서 솔직히 내가 읽을 수 있던 책은 없었다. 언어가 다른 이유였고 거의 모두가 종교적인 책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책 주인이 이 많은 책을 다 읽었는지 궁금했다.
‘다 못 읽은 책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 준비 때 늘 쓰이지요.’
다 못 읽은 책도 있다던 그의 진솔함과 그 많은 책을 품고 있을 그의 정신세계에 관심이 갔다. 한국에서 온 작가와 평생 목회만 한 노 목회자, 스물여섯 해란, 둘 사이의 다름을 뛰어넘을 인연은 그렇게 그의 서재에서 구체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그 시작의 장소, 지적, 신앙적, 정신적인 모든 것을 채우도록 한 그 서재에 물이 스며들어 고쳐야 했는데 제일 먼저 해야 한 일이 책 오천 권을 옮기는 일이었으니 그때부터 책은, 감당하기 버거운 짐이었다.
클리닝 회사에서 인부들이 와 나흘간 상자에 책을 담고 모든 책 상자를 차고에다 임시 보관하던 중에 나는 두 가지를 해야 했다. 책을 어딘가로 보내도록 내 짝을 설득하는 일과, 오천 권의 책을 받아줄 단체를 찾는 일이었다.
내 짝 James Hills 목사는 평생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난민 구호단체를 창립해 그들의 안정된 삶의 정착을 위해 일했고, 많은 몽골 젊은 죄수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구체적인 도움을 주었고, 신장병, 심장병 수술받게 하는 등, 나누는 일을 하며 살았음에도 자신이 평생 공부한 책에는 애착이 심했다. 그에게 책을 떠나보내는 일은 지금까지의 삶과 이별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오천 권을 도서분류법에 따라 다시 자리에 꽂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무엇보다도 그가 건강을 잃으면서부터 책은 책장에 꽂혀있기만 했었는데, 누구의 손에서든 책은 읽혀야 한다는 것이 글 쓰는 일을 하는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몇몇 신학교에 문의해도 더 이상 책을 받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시간이 갈수록 오천 권 책 무게에 짓눌려 몹시 심란하던 몇 주 전 일요일이었다. 예배 마친 후 친교 시간에 폭우로 내가 안고 있던 집안일들을 교회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한 교인 내외가 자기들이 책을 갖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책 못사는 신학생과 목회자들이 많답니다. 오천 권 책은 그들에게 엄청난 선물이 될 거예요.’
내외는, 크리스천 재단의 책 기증 일에 관여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전혀 예기치 않은 제의였다.
‘그들에게 엄청난 선물’이란 그 말이, 오천 권 책이 버거운 짐이라 여긴 내 머리 위의 숯불인 듯, 날 부끄럽게 했다.
그렇게 책의 갈 길은 해결되었는데 절대로 책을 포기하지 않을 내 짝 설득할 일이 남았다.
마치고 집에 오던 길에, 지금도 책 못사는 신학생과 목회자가 많다던, 오천 권의 책이 그들에게 엄청난 선물이 될 것이라던 교인 내외가 한 말을 들려주며, 책들이 당신 대신 하나님 일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책 보내는 일이 내겐 가장 힘들어. 그래, 그들에게 보내자, 공부하게.’
옆에서 가만히 듣기만 하던 그가 말했다.
불가능하다고 여긴 일들이 너무 쉽게 해결되니 오히려 어리둥절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것이, 은혜였다.
결코 계획한 적 없던 책 기증은 그렇게 기상이변으로 서재에 물이 스며든 바람에 이루어졌다. 크리스천 단체에서 이미 2천여 권은 먼저 싣고 갔고, 나머지 3천 여권은 9월이 가기 전에 다시 갖고 간다고 했다.
기상이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님을 알았고, 그 이변으로 내 짝은 가장 애착을 가졌던 책을 떠나보내는 중이고, 그 모든 일을 몸 불편한 그를 대신해 처리하느라 나는 매일 진땀 흘린,
올여름이었다.
소설가 김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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