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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길은 진정한 리더였다
배짱 좋고 임기응변에도 능해
- 김명규 발행인 (publisher@koreatimes.net)
- Aug 04 2023 04:40 PM
판단과 용감성 월등...함정에 빠져 또 잡혀 6.25 특집 주홍길 유격대원(7)
◆북한의 대남 공작원 출신 김현희(오른쪽)씨를 만난 주홍길씨. 김씨는 1987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사건의 범인으로 1990년 3월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으나 같은 해 4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현재 한국에 거주 중이다.
갖가지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가까운 용당리 대신 물방덕리 쪽으로 우회했다. 20여 가구가 사는 진짜 시골이었다. 면사무서에는 5km나 떨어졌으므로 적의 경비망은 없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웬걸, 거기서도 통금시간을 지켜야 했고 마을입구를 지키는 자체 경비원이 있었다.
어찌 이런 시골에도 경비원이 있는가. 북한의 철저한 조직사회, 감시사회는 정말 대단하구나. 그러나 목숨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에 감탄할 새는 없었다. “난 내무서에서 나왔다. 수고들 한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슬쩍 지나쳤다. 가슴은 방망이질 쳤다.
이렇게 해서 위기를 넘기고 인근 화전민 집으로 들어가 저녁을 얻어먹었다. 첫 상륙지 원산앞 사도를 떠난 지 4일. 심신이 몹시 지쳤다. 이제는 거점을 확보해서 흩어진 동지들을 찾아보고 작전 목표였던 운림면 일대의 사정을 알아보아야 했다. 6.25 남침이 시작된 지 거의 1년이 지난 1951년 5월12일. 이날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이튿날 화전민 거처를 나와 산너머 주씨 성을 가진 종씨 집을 찾아 나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공작금으로 가지고 온 북한화폐 20원을 주었다. 쌀 반가마값이었다. 며칠간 묵어가기를 원하자 그들은 두말 않고 받아주었다. 이 뿐 아니라 저녁밥상을 차려왔는데 벽촌에서는 볼 수 없는 진수성찬이었다. 흰쌀밥, 두부국, 콩나물과 여러 산나물 등.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 음식을 정신없이 입에 넣었다.
이것이 내 제삿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밥상을 보고 게릴라 요원의 수칙 ABC를 깜박 잊은 것이다. 우선 나는 종씨지만 정체불명자다. 이런 자에게 상상불가의 성찬을 만들어주었다. 외딴 시골집에서 어떻게 이런 반찬을 구했을까. 서열이 높은 당원 집이 아닐까. 여러가지가 상식에 어긋났지만 판단력이 흐려져서 요원의 기본수칙을 놓쳤다. 그것은 사물을 역으로 뒤집어서 검토하라는 것이다.
배가 부르자 권총을 베고 깊은 꿈속에 빠졌다. 새벽, 찬 물체가 몸에 닿은 것을 느껴 눈을 떴을 때는 장총의 총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꼼작 못하고 포박당했다.
내무서원 출현을 의심쩍게 본 경비원이 상부에 보고, 일대에 비상경계망이 쳐졌고 종씨라는 사람들이 이에 협조했던 때문이었다.
앞으로 닥쳐올 잔혹한 심문과정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고문에 못 견뎌 임무를 불거나 동지들을 팔지 않을까.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에게 잡혔으니 난 죽는 일만 남았다. 피차 고생할 것 없다. 어서 빨리 나를 쏴라”고.
내가 자리에서 꼼짝을 안하자 그들은 달려들어 치고 밟고 끌어당기고 … 별 짓을 다했다. 나는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면서 그들이 장총의 방아쇠를 당기기만을 바랬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죽일 권한이 없었다. 그들은 나를 등에 업고 시오리길의 물방덕리 마을로 데려왔다.
사람들이 몰려와 ‘권총까지 휴대한 거물 반동분자’를 우리 속의 짐승을 보듯 구경했다. 그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저 놈 말도 못하는 반동입니다. 우리를 못살게 굴던 악질 치안대장이었죠. 저런 놈은 죽여야 합니다.”
다음날 나는 고향 천내리로 압송됐다. 운림면 산속에 기지를 마련한 후 자랑스러운 영도 부대원들을 이끌고 반공 임무에 나서려던 내가 이렇게 초라한 몰골로 묶여서 나타나다니. 수치심이 치밀었다. 그들이 나를 차라리 죽여주기를 원했다.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자 담가(담것)를 끌고 와서 나를 눕혔다. 삼엄한 호송행렬이 시작됐다. “어쩔 수 없구나.”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심문에 대응할 각본을 짜기 시작했다. 공작대 사명, 침투경로, 영도부대의 성격, 소속 등 모든 걸 꾸며대기로 계획했고 이를 반복 암송했다.
“이제까지 우리는 당신을 신사적으로 대했소. 그러니 당신도 신사적으로 보답하시오.” 작은 별 1개(경위급)를 어깨에 얹은 젊은 내무서 심사계장은 나를 깨우면서 점잖게 말했다. 나는 방금 잠에서 깨난 것처럼 움직이면서 느릿느릿 의자에 앉았고 곧 책상 위에 엎드렸다. 내무서장이 나타나 나에게 설탕물을 먹였다. 갈증이 풀리면서 정신이 들었다. 이때 청년들과 아낙네들이 심문실에 들어오더니 나를 구둣발로 차고 머리칼을 잡고 늘어졌다. 팔꿈치를 물어뜯기도 했다. 자기 가족을 못살게군 ‘악질’이라고 이들은 소리질렀다.
이들이 떠나자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됐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소속- 한국군 제1군단G2, 기지- 강원도 묵호, 훈련소장- 김한일 소령, 내 임무- 첩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뭘 속이겠소. 어서 빨리 조서를 끝내고 처벌받는 것이 소원이오.” 나는 짐짓 탄원했다.
하루 해가 다 가고 조서용지도 40매를 넘었을 때 그날의 심문은 끝났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피의자 구치소로 갔다. 갑자기 기억이 새로웠다. 그곳은 바로 6개월 전 치안대장으로 내가 골수 공산당원들을 데려와 심문하던 곳이었다.
호송원은 기묘한 미소를 띠면서 나를 불러 세웠다. “주홍길, 모친이 보고 싶지 않냐. 바로 이 건물에 있지. 모셔올까?” 놈들은 이 비참한 상황속에서 모자를 상봉시켜 내 마음을 돌리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진 모자간의 정을 악으로 이용하려는 잔인한 놈들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애원했다. “초라한 내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이지 않도록 해주시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꿈에서나 본 어머니가 복도 끝에 계셨다. 꿈인가. 생시인가. 헷갈렸으나 분명 내 어머니였다. 얼굴은 6개월 전보다 10년은 늙어보이고 머리칼은 흐트러졌다. 입은 옷도 보기 민망할 정도로 남루했다.
어머니는 나를 보시자마자 소리쳤다. “네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됐냐.” 어머니의 뜨거운 눈방울이 내 손목을 적셨다. 나는 차라리 머리를 벽에 부딪혀 죽고 싶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형무소로 끌려가 어머니 속을 태웠던 자식. 그가 아직도 어머니를 괴롭힌다. 나는 내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그들은 내 마음을 사려는 듯 10여일간 감방에 억류됐던 어머니를 그날 밤 석방했다. 나는 독방에 남았다. 팔을 등 뒤로 돌리고 손목은 쇠줄로 묶였다. 나는 다시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고문을 받기보다 자살이 낫지 않을까, 아니면 죽기살기로 탈출을 시도할까.
그때 문득 영도기지의 한철민 부대장이 당부하던 말이 머리에 떠 올랐다. “공작원은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을 포기하면 안된다.”
나는 탈출을 결심했다.
다음날 아침 김이 무럭무럭나는 장국밥이 들어왔다. 어제 저녁 어머니가 이곳을 나가시면서 차입했다는 것. 모정이란 이처럼 끈질기고 끝이 없는가. ‘악질 반동’의 아들 때문에 이곳서 열흘 동안 고초를 겪고 나가시면서 그 아들을 위해서 국밥을 차입해 주시다니… 국밥을 먹는 내내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이를 보답하는 방법은 어떻게든지 살아서 원수를 갚는 것이다.” 난 오기가 나서 몸을 떨었다.
다음날 군 내무서로 이송됐고 곧 구류장으로 인도됐다. 구류장은 ‘죄인’들로 초만원. 앉을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더구나 오물냄새, 사람냄새 등 악취가 코를 찔렀다. 천장에서는 찬 물방울이 떨어져 그때마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수인(囚人)'들은 거의 모두가 함흥이나 흥남, 원산 철수작전에서 낙오된 우익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영양실조 아니면 중병환자로 보였다.
5월15일 깊은 밤 주홍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심문실로 끌려갔다. 별 1개 계급을 단 사회안전부원은 아무 말없이 나를 향해 돌진하더니 주먹질, 발길질을 계속했다. 나는 샌드백이 되어 그의 구타를 고스란히 받았다. 나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의 임무는 조서작성이 아니라 나를 마구 때려 기(氣)를 꺾어놓는 것 같았다. 조서는 받는둥 마는둥 하더니 나를 꿇어앉히고 또 한차례 구둣발 세례를 퍼부었다.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왔다.
무자비하게 얻어맞은 덕택인지 다음날 나는 군(郡)을 떠나 도(道)로 이송됐다. 사회안전부 소속 사복군관과 젊은 사병 2명이 나를 맡았다. 군관은 사복 속에 권총, 사병들은 따발총을 멨다. 얼마 후 시골길에 들어서자 군관은 갑자기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잠바를 벗었더니 내의도 벗으라고 했다. 나를 여기서 죽이려나? 반신반의하면서 내의를 벗어 던져버리자 그는 그것을 둘둘 말아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내가 입은 초록색 미군 내의가 탐이 났던 것이다.
지난 밤에는 죽도록 때리고 아침에는 밥도 먹이지 않고 곧장 걷게 하니 서있기조차 어려웠다. 점심 때가 되자 그들은 나를 세워둔 채 저희들만 국수집에 들어가 한 그릇씩 교대로 먹고 나왔다. 한 사람은 나를 지켰다.
나는 군관에게 사정했다. “배가 고파 못 걷겠소. 나도 국수를 사먹게 해주시오. 돈은 있소.” 대답 대신 그는 내 정강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개소리치지 말라우, 날래 앞장스라.” (빨리 앞장서 걸어라)
도(道) 소재지 원산에 도착했다. 감회가 깊었다. 중학교를 5년간이나 다니던 곳이고 여름이면 명사십리 해변으로 가서 수영하던 곳이 아닌가. 비록 일제 말엽이었지만 당시는 공산치하보다는 훨씬 자유가 있었다.
사회안전부 도본부에서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대좌(대령)에게로 인도됐다. 그는 나를 차갑게 맞으면서 먹이를 본 맹수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널 기다렸다. 앞으로 좋은 체험을 많이 할 것이다.” 말하는 투부터 징그러웠다. 그는 내가 체포당시 휴대한 장비목록과 자기가 보고받은 목록이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것은 당연했다. 나침반은 시골 내무서원이 슬쩍했고 전지 등 침투용 특수용구들은 내무서 군관들이 모두 ‘짭짭’했으니 목록이 다를 수밖에. 이를 알게된 ‘맹수’는 부하들에게 전부 수거해 오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식사가 나왔다. 큰 대야에 조밥이 가득한데 죄수들은 두 손을 벌려서 밥을 손바닥에 받았다. 조금 더 먹으려고 손을 넓게 벌리다가 밥을 바닥에 흘려 얻어맞기 일쑤였다. 팔이 뒤로 묶인 나는 그것마저 불가능했다. 배식요원은 머리를 굴리더니 먼지가 더덕더덕 붙은 마루바닥에 내 밥을 던졌다. 찰기라고는 전혀 없는 조밥은 바닥에 흩어졌다. 난 어안이 벙벙해서 주저하니까 간수들이 와서 “왜, 안먹어? 기분 나쁜가?”하면서 허리를 굽혀 핥아먹으라고 했다. 개처럼? 나는 눈을 감고 반응하지 않았다. 요원 하나가 오더니 내 손목을 풀어주었다. 나는 간신히 조밥 한 덩어리로 입에 풀칠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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